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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바 호수(Danau Toba)에는 거대한 크기의 섬이 하나 있다. 이름은 사모시르 섬(Pulau Samosir). 호수 자체만 놓고 봐도 엄청나게 큰데 호수 안에 섬이 있다니 듣기만 해서는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대부분 여행자들이 또바 호수를 여행한다고 하면 또바 호수 내의 사모시르 섬에 머물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모시르 섬에서 작게 튀어나온 부분인 뚝뚝(Tuk Tuk)에 머문다고 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뚝뚝이 얼마나 작은 지역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섬을 오토바이로 돌아보자고 했을 때도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여행이 대책 없었으니 실행에 옮기는 것도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단순하게 한 바퀴 돌아보자는 내 생각은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던 거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을 옮기고, 곧바로 오토바이를 빌렸다. 그리곤 먼저 뚝뚝 마을을 돌았다. 부킷라왕에서 튜브를 타느라 빨갛게 탄 살이 너무 따가워서 이대로 오토바이를 타면 아예 벗겨질 것 같았다. 선크림부터 사러 갔다. PC방에 있던 어느 외국인의 안내로 오토바이를 타고 몇 분 돌다가 선크림을 살 수 있었다. 돈을 건네 받은 아이는 선크림을 듬뿍 짜서 다리와 얼굴을 바르는 내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뚝뚝을 조금 돌아보는데 내가 있던 선착장 부근은 매우 한적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좋은 호텔과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몰려 있는 곳이 있어, 저녁쯤에 이곳을 들러 맛있는 것을 먹으면 나름 괜찮은 하루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섬을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직전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나쁘지 않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루 종일 섬을 돌다가 지치는 바람에 근사한 저녁 따윈 생각할 틈도 없었다. 사모시르 섬의 크기는 무려 싱가포르의 면적보다도 더 크다. 크기만 놓고 봐도 그런데 비포장도로에 산을 오르는 여정은 정말 끔찍하다.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 사모시르 섬을, 사진으로나마 구경하면 살짝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뚝뚝에서 무작정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렸다. 출발은 신났다.


뚝뚝을 벗어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좌회전을 하면 토목(Tomok), 우회전을 하면 암바리타(Ambarita)가 나온다. 뚝뚝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그런지 고작해야 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일단 왕의 무덤이 있다는 토목으로 향했다.


간간히 차량이 보이지만 한적한 길을 따라 조금만 달리니 토목에 도착했다. 시장 분위기가 살짝 났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해 그냥 지나쳤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주변을 살펴서 그런지 왕의 무덤은 보이질 않아, 계속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마을의 끝이 나왔다.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만났는데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이 부근에 갈림길이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니 비포장도로이고, 오지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다시 돌아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곳도 역시 비포장 도로였다.


역시 이때 돌아갔어야 했나. 스쿠터를 타고 산을 오르다니, 그것도 비포장 길을 말이다. 일단 달렸다. 엉덩이가 아프지만 달렸다. 새부리처럼 지붕이 뾰족한 바탁 전통집도 보이고, 논에서 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도 보였지만, 웬일인지 사람은 볼 수 없었다.


20여분 산에서 달리니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또바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여기엔 전망대 역할을 하는 휴게소가 있어 음료수를 마시며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6천 루피아를 내고 집었던 환타는 색깔이 특이했는데 너무 달았다. 환타를 마시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호수를 바라봤다. 정말 바다처럼 넓은 호수다. 저 멀리 좌측 한편에 내가 출발했던 마을인 뚝뚝이 아주 작게 보였는데 새삼 사모시르 섬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 부탁해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 한 방 찍었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또 달렸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산을 계속 오르고, 또 올랐다. 어떤 집을 지날 때 꼬마아이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굽이굽이 뻗어있는 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가장 의문이었던 것은 외국인 여행자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나처럼 이렇게 섬을 한 바퀴 도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돼지 가족이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뛰어간다.


실로 외로운 여정은 계속됐다. 호수가 보일 때면 잠깐 멈춰서 사진을 찍으면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여유 부리며 호수를 감상한 것 같지만 사실 계속 오토바이를 타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더운 날씨에 계속 달리는 것도 무리가 있어 그늘에서 잠깐씩 쉬었다. 오토바이 열도 식힐 겸 말이다.


이렇게 높은 지대에 집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사실 마을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로 작은 동네만 이어져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어떤 마을에 도착했다. 언던 위에 교회가 있던 작은 마을이다. 그러고 보니 사모시르 섬을 달리면서 교회를 참 많이 봤다. 이슬람이 강한 인도네시아에서 왜 이렇게 교회가 많은지 의아했는데 그건 이 지역의 역사와 아주 관련이 깊었다. 과거 바탁족에게는 죄인을 처형하고 먹는 일종의 식인 문화가 있었는데, 이를 본 서양 선교사들이 개종을 통해 악습을 없앴다고 한다. 물론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닐 당시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 마을에서 론리플래닛을 펼쳐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을 때 소위 ‘멘붕’이 왔다. 지금까지 산을 넘어 힘겹게 지나왔건만 사모시르 섬의 반은커녕 1/5도 돌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급해졌다. 이젠 점심이고 뭐고 없다. 어차피 여행자가 점심을 먹을 만한 식당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혼자 오지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마냥 여유 부리면서 달리다간 오늘 뚝뚝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시 달렸다. 오토바이를 계속 타면 바람 때문인지 멍하기 마련인데 주변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맨 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대체 어딘가.


심지어 비포장도로가 이어졌다. 한동안 이 비포장도로를 달렸는데 더운 날씨와 더불어 쾌적하지 못한 승차감에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덕분에 잠깐씩 멈춰가면서 한적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와 호수를 배경으로 논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이야 말로 진짜 또바 호수를 바라봤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마을의 형태를 갖춘 지역을 지나갔는데 여기서도 여행자를 위한 어떠한 식당이나 카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포즈를 취하던 꼬마 아이가 귀엽다.


드디어 포장도로가 나오나 싶으면 다시 비포장도로가 한없이 이어졌다. 마치 미로에 갇힌 것처럼 계속해서 비슷한 풍경이 나왔다. 이런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리고 다시 지도를 봤다. 지나가던 아이를 붙잡고서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물어볼 정도로 나는 꽤 지쳐있던 상태였다. 어설픈 영어로 나잉골란(Nainggolan)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나잉골란이면 아직 섬의 반도 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멘붕에 빠졌다. 엄청난 비포장도로를 뚫고 왔어도 이제 겨우 1/3이다.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진 논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로부터 다시 1시간 뒤 어느 마을의 교회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교회 안에는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물 한 병을 샀다. 냉장고가 없어 차가운 물은 아니라 그냥 아쉬운 대로 벌컥벌컥 마셨다. 꼬마 아이를 비롯해서 아주머니는 나를 살짝 신기하게 쳐다봤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배는 무지 고팠지만 뚝뚝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또 달려야 했다. 그랬다. 난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일주하겠다는 낭만적인 계획을 꾹꾹 눌러서 버린지 오래고, 오로지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함만 남았다. 위험한 동네는 아니지만 어둠이 깔리면 돌아가는데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상황이 되면 수천가지의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이제 겨우 섬의 반을 돌았다. 다행히 포장된 도로라 운전하는데 한결 편해졌다. 도로 양 옆으로 추수가 막 시작되는 논이 보였는데 굉장히 신기했다. 분명 아까 전에는 모내기를 하는 모습을 봤는데 여기에서는 추수와 탈곡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여긴 이모작이 아니라 삼모작을 한다는 건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했을 뿐인데 모내기부터 탈곡하는 풍경을 보면 이곳에선 시간이라는 게 아예 무시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어느 부자가 탈곡(탈곡인지 타작인지)하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췄다. 낯선 외지인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해맑게 미소를 지었는데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어도 가까이 다가가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교감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저 아쉽기만 하다. 아저씨께 감사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 후 출발했다.


지루한 여정은 계속됐다. 중간에 뚝뚝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는지 찾아 봤지만 전혀 보이지 않아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렸다. 잠깐 멈춰서서 동네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실 뚝뚝에서 출발한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사진 대충 한 번 찍는 것도 자제해야 할 정도였다. 


섬에서 뚝뚝 다음으로 큰, 어쩌면 뚝뚝보다 더 큰 판구루란(Pangururan)에 도착했다. 확실히 이전에 지나온 어떤 마을보다도 크고, 사람이 많아 북적였다.


지도상으로 보면 뚝뚝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원래 내 계획대로라면 여기에서 섬을 넘어가 온천을 가는 것이었지만 이제 온천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더운 나라에서 웬 온천이람. 이제 섬을 반 이상 돌았을 뿐이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난 다음 마을인 시마닌도(Simanindo)를 향해 계속 달렸다. 기름이 떨어져 페트병에 담긴 휘발유 2리터(1만 2천 루피아) 더 채우고 또 달렸다. 제법 잘 빠진 도로가 나와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뚝뚝은 아직 나타날 기미가 안 보였다. 바탁족의 전통 가옥인 뾰족한 지붕은 이제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에 앉아 있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해는 서서히 지기 시작해 이제는 바람이 무척 쌀쌀했다. 큰 도로를 지나 다시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이 나왔다. 시마닌도를 지나 뚝뚝과 가장 가까운 마을 암바리타(Ambarita)로 쉬지 않고 달렸다.


이정표에서 뚝뚝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어찌나 반갑던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숙소까지는 얼마 안 남았다. 물론 이 이정표를 보고서도 몇 십 분을 더 달렸다.


얼마 되지 않아 날은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난 라이트를 켜며 달렸다. 암바리타를 지나고 뚝뚝의 입구로 들어섰을 땐 정말 혼잣말로 “아, 드디어 왔다. 살았다!”라고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드디어 나타난 익숙한 거리. 얼굴은 땀으로 범벅, 몸은 천근만근인 상태로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간을 보니 난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략 8시간 이상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팁
1.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지만 진정한 또바 호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평화로운 동네에서 소를 끌고 가는 아이, 호수를 배경으로 모내기를 하거나 벼를 탈곡하는 모습은 상당히 이국적이다.

2. 나처럼 미련하게 섬을 한 바퀴 돈다는 생각을 한다면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때 돌아올 것을 각오해야 한다. 사실 섬을 가로지르는 길은 지도에도 나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길이 너무 좁아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난 그냥 한 바퀴를 돌아버렸다. 떠나기 전에 길을 먼저 찾아봐라.

3. 대부분 여행자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빌리더라도 뚝뚝 내에서나 가까운 마을(토목이나 암바리타) 정도만 돌아보는 편이다. 일단 포장된 도로라 오토바이 타고 달리면 크게 힘들지 않다. 지나가면서 봤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암바리타에는 ATM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