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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자식들을 만나기 전만 해도 메단은 참 괜찮았다. 날씨가 무지하게 더워 땀을 흘리는 것도, 볼거리 없는 메단 거리를 헤매는 것도, 심지어 사방에서 울리는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까지도 괜찮았다.

난 메단의 주요 관광지인 그랜드 모스크(Mesjid Raya)와 이스타나 마이문(Istana Maimoon)을 보고 난 뒤, 딱히 할 게 없어 아무생각 없이 거리를 걷기만 했다. 새로운 여행지에 도착해서 그곳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걷기보다 좋은 것은 없다. 어차피 저녁이 되기 전에 떠날 메단이었다.


이스타나 마이문에서 직선 거리로 이동하면, 메단의 중심부가 나온다. 중심부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은 없다. 낡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고, 좀 더 많은 차량과 베짝이 도로 위에 뒤엉켜있을 뿐이다.


하다하다 이젠 걷는 걸로 시간을 때우다니. 한참을 걷다 너무 더워 좀 괜찮은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45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려다가 가격이 2만 루피아를 훌쩍 넘길래, 그냥 망고 주스를 마셨다. 망고주스도 2만 루피아였는데 택스 2천 루피아가 추가로 붙었다. 


다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거리 분위기는 케사완 스퀘어(Kesawan Square)부터 바뀌었다. 필리핀 마닐라의 스페인 거리, 인트라무로스와 매우 유사한 느낌이 났다. 여전히 인도는 좁거나 없어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 곳이지만, 훨씬 깔끔해진 거리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 낯선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곳을 지나면 꽤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 늘어선 메르데카 워크(Merdeka Walk)가 나온다. 난 메르데카 워크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또 쉬기로 했다. 딱히 배고프지 않아 콜라 한잔만 시켜놓고,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했다. 사실 여기에서 찬드라와 다시 재회할 예정이었지만, 찬드라의 일정은 계속해서 늘어졌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더 늦게 온다는 말에 다시 뜨거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걷고 또 걷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메르데카 워크에는 야외에 테이블을 놓고 있는 식당이 많았는데 저녁에 온다면 제법 괜찮은 분위기일 것 같다. 가격은 알아보지 않았지만, 그리 비싸지도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수를 하나 했다. 다음 목적지인 부킷라왕(Bukit Lawang)으로 가는 버스 터미널이 메단 몰(Medan Mall) 근처에 있는 줄 알았다. 지도를 대충 본 내 잘못이다. 그래서 시간도 남겠다, 걸어서 메단 몰 근처로 간 것이다.


메단역을 지나갈 때 “이봐, 사진 한 장만 찍어봐!”라는 아저씨의 말에 웃으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아저씨들은 왜 역 앞에서 널브러져 있는 걸까?


메단 몰은 역을 건너가야 했다. 메단에도 기차가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해 좀 신기하게 바라봤다.


한참을 걷다 보니 시장도 나오고, 메단 몰도 나왔다. 시장 구경도 잠시 할까 하다가 가장 시급한 버스 터미널을 찾기로 했다. 이제부터 지도를 보고, 거리를 걷는 것만 몇 십분 계속했다. 메단 몰 바로 옆에 있다고 하는 버스 터미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지도를 잘못 봤나 싶어 돌아가면 똑같은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했다. 지도에만 나와 있는 버스 터미널인건지 아니면 내가 정말 못 찾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메단 몰 근처에는 사람도 많은데 바로 옆의 골목은 참 조용했다. 사건은 바로 여기에서 일어났다.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동시에 욕이 튀어나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넘어지느라 욕을 하다 말았다. 넘어지는 동시에 오토바이 날치기임을 알아챈 것이다. 가끔 영화를 보면 아주 찰나의 순간에도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별생각을 다 하고, 정확히 상황을 분석할 때가 있다. 바로 그 당시 상황이 딱 그랬다.

뒤에서 소리가 들리 길래 난 그냥 지나가는 오토바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날치기였던 거다.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공중에 붕 떠서 넘어진 탓에 아파 바로 일어날 순 없었다. 누워서 앞을 바라보니 도망가는 녀석들이 보였고, 떨어진 내 가방이 보였다. 가방이 내 팔에 걸려서 탈취에 실패한 것이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떨어진 가방을 주웠다. 그리고 팔과 다리에 피가 철철 흘리는 것을 보고, 다시 욕을 했다.

최악의 기분을 만끽했다. 사람 좋다고 늘 이야기하던 인도네시아에서, 그것도 대낮에 이런 일을 당하다니. 그날 하루는 이 익숙하지 않은 기분과 싸워야 했다.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으려 해도 오토바이 소리만 들으면 뒤가 섬뜩했다. 다시 걷다가 근처 교회 앞에서 길을 묻는데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 피가 나고 있는데 한다는 소리가 “너, 교회 다니니?”였다. 그리고 메단 몰 앞에 있는 경찰에게 하소연 했지만, 내가 뭘 잃어버린 것도 아니니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당시 기분이 정말 안 좋았지만,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를 꺼내는 모습을 몇 번 보여 내가 표적이 된 모양이지만, 그야말로 천만다행으로 운수가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안 좋은 일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 더불어 그 자식들은 운수가 참 나쁜 날일 거다. 거의 다 낚아 챈 줄 알았던 가방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한 가지 분명한 건 여행자인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그래도 그런 자식들에게 욕은 마구 퍼부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