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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에서 바로 수도 리마로 올라가려 했지만 잠깐 바다를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서쪽으로 향했다. 이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파라카스(Paracas)라는 나름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난한 여행자들의 갈라파고스'라고 한다. 갈라파고스 섬은 에콰도르에 있는 섬으로 수많은 동물과 아름다운 해양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진화론으로 잘 알려진 다윈이 기초 조사를 했던 곳이 바로 갈라파고스다. 파라카스가 얼마나 대단한 곳이면 그 갈라파고스가 별명으로 붙었을까? 궁금해서 가보기로 했다. 


이카에서는 버스를 타고 1시간 20분 정도만 가면 파라카스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다. 배낭을 챙겨 들고 시내 방향으로 걷다가 싸구려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이카부터 더워진 날씨에 밖으로 나가기 꺼려졌지만 잠깐 동네를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기념품 가게가 꽤 많았다. 


해변에는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꽤 많았으나 기대했던 것에 비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작은 마을에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이다 보니 물가가 꽤 비쌌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호객꾼을 물리치고 길가에 있는 노점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어설픈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도하니 웃음을 지으며 몇 마디 한다. 자욱한 연기에 구워지고 있는 것은 치킨, 8솔이었다. 냄새를 맡고 강아지들이 몰려왔지만 혼자 먹기에도 양이 부족해 나눠줄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보면 대체 왜 이곳이 '가난한 여행자들의 갈라파고스'인지 실감나지 않는다. 여느 해변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조금 더 알아보니 파라카스에서 야생 동물을 보고 싶다면 국립공원을 찾아가야 했다. 크게 두 군데가 있었는데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예스타 섬(Isla Ballestas)이었다. 어렵지 않게 숙소에서 투어를 예약했다. 보통 투어비는 30솔이었지만 입장료가 별도였다. 다음날 아침 선착장으로 나가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을 가득 태운 배는 시끄러운 모터 소리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짠 내음이 가득 담긴 바다 바람을 맞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투어를 하기 적합하지 않은 흐린 날씨가 불만이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좌측 언덕 위에 독특한 그림이 보였다. 누구는 선인장이라고 하고, 누구는 촛대라고 하는데 이 그림은 지금도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고 한다. 더 신기한 점은 모래 언덕에 그린 이 그림이 굉장히 오래되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염분이 섞인 바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지금까지도 그림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잠시 후 우리는 엄청난 수의 새를 보게 되었다. 바위 섬에 가득 새가 앉아 있어, 새가 바위를 뒤덮고 있는 모양새다.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는 물개와 바다사자도 볼 수 있었다.


바예스타 섬 투어 관련 사진을 보면 꼭 나오는 바위 다리에 도착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다리 주변으로는 여러 동물이 가득했다. 


너무 멀리 있어 카메라로 담기 어려웠지만 한 줄로 걸어가고 있는 펭귄도 볼 수 있었다.


투어를 즐기는 다른 배도 다리 주변에 모여 한동안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었다.


바예스타 섬 투어는 오로지 보트 위에서만 보고 즐길 수 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동물을 보거나 섬에 내리지 못한다. 물론 굳이 가까이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위 섬마다 커다란 바다사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한가로이 늘어져 있다.


여러 동물을 보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문제는 지독한 냄새로 잠시도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 지독했다. 나미비아 케이프크로스에서 엄청난 무리의 물개를 봤을 때 못지 않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새가 까맣게 뒤덮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새가 많다 보니 세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보트는 계속 주변을 맴 돌았지만 특별히 관심이 가는 곳은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보긴 했어도 새보다는 얘네들이 더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꺽꺽거리는 소리와 냄새로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동물이었다.


이렇게 여러 바위 섬 주변을 돌아본 후 파라카스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더 일정이 짧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하늘이 맑아졌다. 여행자의 운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기대했던 바예스타 섬 투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 다른 투어는 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를 접게 만들었다. 그냥 혼자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가난한 여행자들의 갈라파고스는 무슨, 거창한 별명에 비해 볼거리는 별로 없었다. 애초에 '가난한 자'를 위한 곳이니 실망할 필요는 없었던 것일까? 가난한 여행자인 나는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아레키파를 여행할 때 숙소에서 만났던 독일인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고 있어 페루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많이 가봤다고 했다. 페루 북부의 마추픽추라 불리는 쿠엘랍(Kuelap)이 있다는 것도 이 아저씨 덕분에 알게 됐다. 그리고 파라카스 부근 피스코(Pisco)에는 또 다른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 탐보콜로라도(Tambo Colorado)가 있다고 들어 찾아 가보게 되었다. 어떤 유적지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시를 간다는 의미도 있었다. 피스코는 파라카스에서 그리 멀지 않아 콜렉티보를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었다.


파라카스는 그래도 관광객이 많아 꽤 밝은 느낌이었다면 피스코는 낡은 건물과 칙칙함이 가득한 작은 도시였다. 거리에서 관광객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오로지 벽돌만 쌓아 올리고 철근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집만 보였다.


유적지를 바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간이 애매하다는 핑계를 대며 그냥 동네를 돌아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이런 곳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어쩌면 이상한 여행자만 가능할지 모른다.


다음날 탐보콜로라도를 가기 위해 거리로 나섰는데 광장에서 어떤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퍼레이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꼬마 아이들이 걷는가 하면, 반짝이는 복장을 입고 안무를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이런 퍼레이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피카츄가 보였다.


탐보콜로라도로 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시장 근처에서 미크로(미니밴)를 탈 수 있다고는 알아 냈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사람마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복잡하고 지저분한 시장 근처에서 혼자 걷기를 수십 분, 탐보콜로라도로 가는 미크로를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출발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고 했다.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게 없을까 미크로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철판에 돼지고기를 구워 파는 음식이 있었다. 딱 봐도 맛있어 보여 주저하지 않고 하나 달라고 했다. 먹기 좋게 돼지고기를 자른 뒤 감자와 옥수수를 넣고 그 위에 상추를 올려줬다. 껍질 부위가 살짝 딱딱하지만 고기는 부드러워 보쌈을 먹는 것 같았다. 매운 소스를 뿌려 먹으니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이렇게 맛있게 먹었는데 3솔밖에 하지 않았다.


하나 더 달라고 해서 또 먹었다. 아주머니와 어설픈 스페인어로 몇 마디 주고 받았는데 무척 즐거워하셨다. 그러다 이 동네에서 사진 하나 남기지 않는 것 같아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으로 남겼다. 아주머니는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무래도 시장은 사람이 많아 복잡한 데다가 이곳에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눈에 띄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미크로에 탔는데 창문 너머로 아주머니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탐보콜로라도까지 가는 동안 후덥지근하고, 지루했다. 피스코에서 45km 떨어져 있지만 작은 마을을 거치며 1시간이나 걸렸다. 여기서 내린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과연 이런 곳에 관광객이 찾아오는지 의심부터 들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다행히 사람은 있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관광객이 찾아왔으면 반가워 할 법도 한데 입장료로 5솔만 받아갔다. 사무실 옆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메마른 땅으로 나가면 거대한 흙벽돌 유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관광지다 보니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알기 어려웠다. 이곳 역시 잉카의 유적이라는 것, 이 지역의 이카(Ica)와 친차(Chincha)를 정복해 몇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게 되었다.


15~16세기에 만들어진 곳으로 잉카제국의 행정구역, 제단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흙벽돌로 쌓아 올렸지만 잦은 지진에도 피해가 없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고 한다. 


문을 통해 들어가보면 여러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처에 가이드나 안내판이 전혀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돌아봤다.


탐보콜로라도의 또 다른 이름은 푸카와시(Pukawasi)로 '빨간집'이라는 뜻이다. 벽면에 남아있는 빨간색 도료 때문이다. 


어느 방에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혼자 외로이 돌아봤다. 멀리서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잠깐 보이긴 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사다리꼴, 삼각형 무늬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가면 막혀 있는 벽을 만나게 된다. 단순한 구조인데 벽면이 비슷해 미로처럼 헤매기도 한다.


위로 올라가 탐보콜로라도를 내려봤다. 여러 개의 방이 복잡하게 있고, 바로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는 구조였다. 


뒤에 있는 언덕에 뭔가 있는 것 같아 올라가봤다. 그런데 관광객이 오르는 곳이 아닌 듯 길이 아예 없었다. 일단 오르기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힘들게 올라갔는데 아무 것도 없다. 언덕 위에 세워 놓은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언덕 위에서 탐보콜로라도, 그 앞을 지나는 도로, 그리고 멀리 검은산을 바라보며 잠시 바람을 쐬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봤다 생각해 내려가는데 가는 길이 너무 미끄러워 식은땀이 흘렀다. 손을 짚고 겨우 내려갔다.


애초에 탐보콜로라도가 어떤 유적지인지도 모른 채 왔으니 어떤 의미를 찾겠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탐보콜로라도를 카메라에 담았다.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돌아가는 것도 문제였다. 도로에는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었는데 조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었다. 미크로가 언제 올지도 알 수 없으니 마냥 기다려야 했다. 만약 미크로가 오지 않으면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 피스코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20분 정도 기다리니 미크로가 보여 손을 흔들어 세웠다. "피스코?"라는 말에 아저씨는 손짓을 보였다.


먼 거리를 왔다갔다 했으니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여전히 어색했던 피스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적당한 곳에서 치킨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동네를 잠깐 걸었다. 밤에는 날씨가 선선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페루 여행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외국인이 나 혼자였던 곳은 여기뿐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더 한적하고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