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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람바난도 그랬지만 보로부두르 역시 저녁이 되면 족자카르타로 가는 시외버스가 일찍 끊겼다. 근데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마지막 버스를 타지 않았다. 단순히 지도상에 있던 다른 사원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프람바난이야 늦게까지 있는 라마야나 공연을 보느라 밤에도 여행자가 있었지만 보로부두르는 사정이 달랐다. 고작해야 6시도 되지 않았는데도 버스가 없었다.

보로부두르를 나가자 아까 베짝 아저씨가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냐면서 태워주겠다고 하는데 버스 터미널까지 정말 가깝다는 것을 안 이상 탈 리가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걸어가는데 옆에서 계속 쫓아왔다.


여행자가 그렇게 많았던 보로부두르였지만 막상 저녁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대부분 보로부두르를 투어를 이용해서 왕복하는가 보다.


정말 끈질기게도 여전히 베짝 아저씨는 옆에 따라 붙었다. 그렇게 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약간 퉁명스러운 표정만 지은 채 따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 진드기가 따로 없다. 그렇게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다른 아저씨가 와서는 이 버스가 마지막이니 얼른 타라고 했다. 좀 고민을 하다가 결국 타지 않았다. 다른 사원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도를 살펴보니 가장 가까운 파원 사원(Candi Pawon)까지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다. 파원 사원을 근방으로 2개의 사원이 더 있었는데 이 사원들을 둘러보고 돌아가자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가까웠던 사원도 결코 가깝지 않았을 뿐더러 도대체 돌아가는 교통편은 어떻게 하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목적지인 파원 사원으로 간다고 하자 아까 베짝 아저씨가 또 끼어들었다. 파원까지 4만 루피아, 3개 사원을 다 돌아보는데 15만 루피아라고 가격을 일러주는 것이다. 일단 가격도 너무 비쌌고, 굳이 돈을 내지 않아도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베짝 아저씨가 결국 떠나고, 조금 걸으니 다른 베짝 아저씨가 접근했다. 10분 동안 그 사원들은 너무 멀으니 꼭 베짝을 타야 한다며 설득을 하는데 괜찮다고 해도 계속 따라왔다. 결국 가격은 7만 5천 루피아까지 떨어졌으나 타지 않았다. 지나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리 멀지 않다는 대답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30분간 걸었다. 대체 가깝다는 기준이 어느 정도이길래 걸어서 30분이란 말인가? 잠시 후 어느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에 그리 근사한 유적이 있을지 의심을 하면서 마을의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할 때쯤 뒤에서 어느 할머니가 나타났는데 아주 인상이 좋으셨다. 환하게 웃으면서 파원 사원을 안내해 주셨다. 언덕의 정상까지 올랐을 때 파원 사원을 만날 수 있었는데 실망의 탄성을 내뱉었다. 도착해서 보니 의외로 별게 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유적지 보로보두르 근처에 있는 사원이기에 그리고 지도에 나와있었기 때문에 대단한 규모의 사원이라 여겼던 것이 애초에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물론 사원의 크기를 놓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힘들게 찾아왔는데 관광지라고 보기 어려운 그냥 마을의 작은 사원이었던 것이다.

파원 사원을 뒤로 한 채 터벅터벅 언덕길을 내려왔다. 마을의 가장 아래에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물을 사려고 보니 시원한 게 없어서 그냥 나왔다. 이제 다음 사원이자 가장 큰 사원으로 여겨지는 멘둣(Candi Mendut)으로 향했다.

좀 걷다 보니 길이 너무 좁고, 어두워서 제대로 멘둣 사원까지 찾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파원 사원을 살펴봐서 그런지 멘둣 사원도 큰 기대를 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좀 고민하다가 결국 보로부두르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불과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지만 칠흑같이 어두워서 왔던 길도 헷갈렸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제 족자카르타까지 어떻게 돌아가냐였다. 정 돌아가는 교통편이 없다면 그냥 보로부두르 마을에서 자면 되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투어를 예약한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무조건 족자카르타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한참을 겨우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의지해 걸은 끝에 보로부두르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보로부두르 마을에서 족자카르타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일단 막차는 한참 전에 끊긴 상태였으니 다른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가장 먼저 오토바이와 흥정에 돌입했다. 1인당 20만 루피아를 불렀다.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10만 루피아라도 고민되는 상황이었는데 20만을 부르니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타기 힘들었다. 오토바이 아저씨들은 족자카르타까지는 너무 멀어 돌아오는 기름값까지 계산해도 그렇게 남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실 여기에서 족자카르타까지는 거의 50km정도 떨어져 있을 정도로 굉장히 먼 거리였다. 오토바이는 17만 5천 루피아까지 떨어졌지만 더 내려가지 않았다.

일단 보로부두르 마을까지 더 걸어갔다. 이제부터는 방법이 없었다. 절박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는 히치하이크뿐이었다. 마을 입구 앞에서 거대한 버스로 보이는 차량이 보이길래 다가가서 태워달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큰 트럭이었다. 같이 있었던 일행은 인도네시아어를 찾아가면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는데 정말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의외로 이 아저씨들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었다.

족자카르타까지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멀리까지는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중간 마을까지만이라도 태워다 달라고 하니까 그건 괜찮다고 얼른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간 마을까지만 간다면 또 어떻게든 이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량은 거의 5톤 트럭이었는데 아저씨는 남자니까 뒤에 올라가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히치하이크를 할 줄 나도 몰랐다. 다만 잠깐의 여행 동안 인도네시아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크도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아마 다른 나라의 시골 마을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트럭 뒤는 자재를 싣는 공간이라 그런지 천막이랑 나무가 몇 개 있었다. 아저씨는 출발하기 전에 꼭 붙잡으라고 일러뒀다. 그때부터 트럭은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도로를 달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마을을 지나쳤다. 한국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이면 이상한 기분이 들 텐데 인도네시아에서 낯선 사람의 트럭 뒤에 올라타니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줄곧 트럭 위에 서서 세찬 바람을 맞은 채로 있었다. 아무리 더운 열대 기후라고 하더라도 밤에는 상당히 쌀쌀한 편이었는데 바람도 꽤 차가운 편이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맞는 바람은 무척 거세서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1시간 가량 달렸던 것 같다. 분명 중간 마을까지 태워다 달라고 했는데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것인지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얼핏 표지판을 봤을 때는 중간 마을을 지나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뜩 뒤를 쳐다봤는데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버스였는데 족자카르타로 향하고 있었다. 신호가 멈췄을 때 이 버스를 보면서 ‘저 버스를 타면 족자카르타로 갈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트럭은 멈췄다. 순간 태워다 달라고 하는 그 마을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바로 뒤에 그 버스도 멈춰선 것이다. 알고 보니 트럭 아저씨들이 버스를 세운 것이었다. 내리자마자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할 시간도 주기도 전에 얼른 버스에 올라타라면서 재촉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시간도 없다고 하셨던 아저씨들이 중간 마을까지 태워다 주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진도 같이 찍고, 음료수라도 대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럴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너무 고마웠다.

나중에 버스에 올라타서 운전석 옆에 탔던 친구가 말하길 이 트럭 아저씨들은 우리가 타자마자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이 탔으니 어떻게든 족자카르타로 보내줄 생각이었던 것인데 더 고마웠던 점은 운전하는 아저씨는 중간 마을을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아저씨가 이제 그만 가야 한다고 하는데도 운전하던 아저씨는 웃으면서 무시했다고 한다. 아마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족자카르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저 제대로 고마움의 표시를 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쉽기만 하다.


아무튼 버스에 올라타니 안에 있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신기하게 쳐다봤다. 이제 편안하게 족자카르타까지 간다는 생각에 안심이 됐다. 정말 우여곡절을 다 겪은 후 결국에는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니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잠시 후 버스 승무원처럼 보이는 한 아저씨가 오더니 우리에게 물을 건네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비행기를 타거나 버스를 타면 작은 물을 주는데 빨대를 꼽아 마실 수 있었다. 물을 줄 때 나는 버스를 탔으니 우리가 얼마를 내야 하냐고 물어봤는데 이 아저씨가 웃으면서 돈은 안 받는다고 말을 했다. 왜 돈을 안 받는지 의아해 하다가 잠시 후 곰곰히 생각해 보니 우리는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탄 것이 아니라 중간에 도로에서 탔기 때문이라 돈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막막한 상황에서 고마운 마음이 계속 들었던 순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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