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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간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이 끝났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닐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뿌듯함과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우리와 함께 출발했고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다른 서양인 여행자들과 함께 푸레르토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들 골아 떨어졌다.


피곤할 법도 한데 푸에르토나탈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술을 준비하고 요리를 해서 만찬을 준비했다. 


다음날에는 호스텔에 대거 서양인 여행자가 몰려왔는데 놀랍게도 그 중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 한국말로 몇 마디를 나누니 옆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이 친구는 미국인으로 아직 부족해 한국말을 더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다.


등산화가 맞지 않은 상태로 계속 걸은 탓에 내 발목은 정상이 아니었다. 다들 내 발 상태를 보고서야 왜 내가 그렇게 힘들어 했는지 이해할 정도였다. 발도 발이었지만 몸도 피곤해 하루 정도 더 쉬고 싶었는데 우리는 이미 페리를 예약한 상황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페리를 타러 갔다. 여기서 트레킹을 함께 했던 마오와 동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겨울이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비막(Navimag) 페리는 운행하지 않았고, 이 페리도 딱 중간 지점인 토르텔(Tortel)까지만 간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페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데다가 침대가 없었다.


밤에 페리를 탔지만 실제로 출발한 시각은 새벽이었다. 바깥 경치를 보러 밖에 잠깐 나가봤는데 칼바람에 금세 몸이 얼어붙었다.


예상은 했지만 시간은 굉장히 더디게 흘렀다. 계속 먹고 자고, 다시 자고 먹기만 했다.


페리에 탄 지 이틀이 지났을 때 아주 작은 마을 푸에르토에덴(Puerto Eden)에 도착했다. 사실 접근조차 어려워 어떻게 이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칠레는 동서가 아닌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나라이고 이 부근은 복잡한 해안선과 산으로 인해 더더욱 다른 곳과 비교된다.


1시간 정도 페리가 잠깐 정박한다고 해서 이 작은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마을은 굉장히 작아 30분이면 충분했다.


나무로 지어진 집과 그 집을 이어주는 나무다리가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마을이 작아도 슈퍼는 있다. 간단한 간식 거리라도 사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맥주를 한 캔 샀다.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이색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는 참 좋다.


잠깐의 휴식도 끝나고 다시 페리에 탔다. 그리고는 길고 긴 항해가 이어졌다. 하루 정도는 괜찮았는데 이틀이 지나니 앉는 자리도 불편했고, 무지하게 지루했다.


어떻게 지루함과 싸워 이겼는지 모를 무렵 토르텔에 도착했다. 이미 시각은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 예상보다 5시간 늦은 3일째 새벽이었다. 그럼에도 각자 여러 이유로 페리를 맞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우리와 같은 여행자를 데리고 가려는 숙소 주인도 몇 명 보였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우리는 가격만 알아 보고 어느 할머니를 따라갔다. 페리에서 내렸던 곳에서 족히 20분은 걸어 마을의 거의 끝이라고 여겨진 곳에 숙소가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집 안을 가득 메웠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뒤 나무다리를 따라 걸었다. 토르텔의 나무다리는 푸에르토에덴보다도 더 길고, 여러 갈래로 뻗어 있어 훨씬 근사해 보였다. 여행자에게는 이런 나무다리가 그저 신기할 뿐이다.


토르텔 역시 지도에서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마을이지만 여기부터 도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다른 마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머물다 떠나 아쉬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비포장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코크란(Cochrane)에는 어두워진 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 역시 작은 마을이라 그저 하루 쉬고 다음날에 다시 떠날 계획을 세웠다.


숙소는 어느 가정집처럼 느껴졌다. 난로가 공기를 따뜻하게 만들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아저씨들이 양고기를 먹으며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리는 토르텔부터 함께 한 독일인 세바스찬 아저씨, 칠레인 페르난도 아저씨, 스페인 여행자 마리아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금 조합이 이상하기도 했는데 일정이 비슷해 계속 같이 움직였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또 이동했다. 김이 서린 창문을 닦아내자 아직도 떠있는 달이 보였다. 산 위에 있는 눈이 보였다. 이럴 거면 왜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육로로 이동하는지 나 역시 잘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남들이 가지 않는 지역을 여행하게 되고,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으니 이동만 해도 손해는 아니라고 할까.


오랜만에 제법 큰 도시에 도착했다. 물론 다른 도시에 비하면 코이아이케(Coyhaique) 역시 무척 작은 규모지만 아이센델헤네랄카를로스이바녜스델캄포 주의 주도다. 조금 북쪽으로 올라왔다고 날씨가 따뜻했다.


나름 열심히 북쪽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산티아고까지 가려면 아직 1700km로 한참 남았다. 여전히 해안선이 복잡해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는데 마리아와 세바스찬 아저씨가 교통편을 알아 본 결과 배를 타는 게 가장 좋아 보였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아 우리는 만장일치로 페리를 타고 푸에르토몬트로 가기로 결정했다. 


코이아이케에서도 딱히 여행을 했다 보다는 동네를 돌아다니고, 페리를 예약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장을 보러 마트에 갔을 때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단 번에 알아보고 어느 가족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부족한 스페인어 실력으로 몇 마디 이어갈 수 없었지만 우리가 여행자라는 사실과 딸이 KPOP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차카부코에서 나비막 페리를 탈 수 있었다.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푸에르토몬트까지 함께 갈 줄 알았던 마리아는 갑자기 생각을 바꿔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다. 우리는 짧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아이센(Puerto Aysen)으로 이동했다.


푸에르토아이센에 도착하니 설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인상적이었다. 점심을 이곳에서 먹을까 고민하다 곧장 미니 버스를 타고 차카부코로 갔다. 


페리 터미널에는 우리를 태울 페리가 정박해 있었다. 다만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터미널 내에 있는 휴게소에서 인터넷을 하는 것도 잠시 이내 지겨워졌다. 시간도 많이 남았기에 차카부코를 잠깐 걸어봤다.


그리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동네였다. 너무 한적해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기 힘들었다.


오로지 강아지 한 마리만 꼬리를 흔들며 반길 뿐이었다.


아르헨티나와 달리 칠레에서는 해산물을 먹나 보다. 아무 식당에 들어가 허기를 채울 생각으로 볶음밥인 줄 알고 주문했는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은 조개 스프였다. 거대한 홍합과 백합으로 여겨지는 조개가 들어있었고, 숟가락으로 안을 넣어 보니 밥알이 있었다. 진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페리는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넓은 공간도 있고, 침대도 있었다. 게다가 매 끼마다 밥을 주니 무척 마음에 들었다. 푸에르토나탈레스에서 토르텔까지 탔던 페리보다 가격도 저렴한데 여러 면에서 훨씬 좋았다. 


푸에르토몬트로 가면 사실상 칠레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끝나게 된다. 남들 기준으로 여행이라고 해봐야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밖에 없긴 하지만 이곳저곳 많이 가봐 좋았다. 물론 무지하게 추웠던 기억도 함께 있지만.


남쪽이었면 눈이 내렸을 텐데 푸에르토몬트는 이제 따뜻한 지역인지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론 체감하는 날씨도 꽤 따뜻했다.


푸에르토몬트가 나름 큰 도시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 그리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대부분 비행기를 타거나 칠로에 섬을 가기 위해 잠깐 들리는 곳이다. 딱히 유명한 관광지도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수산시장이 있다고 한다. 남미뿐만 아니라 여행을 하면서 해산물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어 부푼 기대감을 안고 앙헬모(Angelmo) 수산시장을 찾아 나섰다. 


수산시장에는 관광객이 꽤 오나 보다. 입구서부터 식당으로 데려 가려는 호객 행위가 있었고, 그 중에는 영어로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만에 구경하는 해산물에 비린내도 잊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요리해서 먹을 생각에 홍합과 연어를 샀다. 가격도 저렴했다.


숙소로 돌아와 홍합탕을 끓였는데 국물이 정말 끝내줬다. 한국에서 보던 홍합보다 배로 큰데 그나마 우리가 샀던 건 조금 작은 크기였다. 너무 크면 홍합탕을 끓일 때 냄비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오븐에 연어를 구웠는데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사실 종원이형과 비호가 나보다 요리를 잘해 내가 나서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난 그저 먹기만 했다.


칠로에 섬으로 가는 두 명과는 달리 나는 푸에르토바라스(Puerto Varas)로 갈 예정이라 다음날 아침 헤어졌다. 원래부터 혼자 여행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혼자가 됐다. 푸에르토바라스는 푸에르토몬트와 거의 같은 생활권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가까웠다. 버스를 타니 20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호스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한 뒤 잠깐 쉬고 있을 때 수염이 덥수룩한 여행자 한 명이 들어와 대뜸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영국인 니일과 미국인 데이빗과 함께 폭포를 보러 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람들과 헤어졌는데 난 또 다시 사람들을 만나 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여행이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같이 가자는 말에 데이빗의 렌터카로 왔는데 폭포는 매우 작았다. 그럼에도 산책로를 따라 시원하게 흐르는 물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푸에르토바라스는 작은 마을이지만 제법 관광지 같았다. 외국인 여행자도 많이 보이고, 동네 분위기가 좋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불의고리'라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있는 칠레라 화산이 많은 편이다. 그 중 푸에르토바라스에서 볼 수 있는 오소르노 화산은 비교적 최근인 1960년 칠레 대지진 당시 폭발했었다. 지금은 아주 조용하게 쉬고 있는 휴화산이라 호수로 가서, 혹은 조금 더 가까이에 가서 설산을 구경하면 된다.


푸에르토바라스에 있는 3일 동안 계속 비가 왔다. 날씨만 좋다면 호수에서 카약도 타고, 산도 오를 텐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비가 그치면 잠깐 동네를 걸어보는 게 나의 유일한 여행이었다. 사실 여행이 길어지면 뭔가 특별한 것을 하려는 욕심은 없어지게 된다.


니일과 칠레 모녀는 내가 2년 동안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무척 놀라워했다.


칠로에 섬에서 나온 비호와 다시 만나 푸콘(Pucon)으로 향했다. 푸콘은 칠레 중부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로 화산을 트레킹하거나 온천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여행자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물론 푸콘에서 지내는 5일 동안 우리를 제외한 다른 한국인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푸콘의 배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설산이 있고, 한적하지만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호수가 여행자의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푸에르토몬트부터 날씨가 계속 안 좋았는데 푸콘에 도착한 이날은 파란 하늘이 보이는 화창한 날씨였다. 하지만 딱 하루뿐, 푸콘에 머무는 동안 계속 비가 왔다. 칠레 중부의 경우 겨울이 되면 계속 비가 오는가 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났던 은정이를 푸콘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서 일주일 동안 뭐하고 있었냐고 물어보니 아무 것도 안 해도 시간 잘 간다는 말만 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니 3시간이 지났다. 정말로 시간은 잘 갔다.


관광도시답게 기념품 가게가 정말 많았다. 다만 비수기라 그런지 호객을 하는 사람도, 물건을 사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호수에 가면 배를 타라고 하는 아저씨들이 있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마침 종원이형도 푸콘에서 합류하게 되어 오랜만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 가격이 싸서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닌데 너무 맛이 없었다. 


푸콘을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화산 트레킹을 하는데 나는 꼭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단 가격도 10만원을 훌쩍 넘어 부담이 됐고, 다른 나라에서 화산을 많이 봤기 때문에 굳이 분화구에서 연기를 조금 보려고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정상을 오른 후 썰매를 타는 것처럼 신나게 내려올 수 있다는 말에는 살짝 끌리긴 했지만 결국 푸콘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푸콘에서 화산과 더불어 유명한 것이 있다면 바로 온천이다. 그 중 떼르마스로스포소네스(Termas Los Pozones)는 가장 가깝고 대중교통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다. 야외에 탕이 여러 개 있어 가볍게 온천을 즐기기에 적당했다. 첫 번째 탕은 발을 쉽게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는데 두 번째, 세 번째 탕으로 갈수록 물이 미지근하다. 비가 오는 와중에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리고 탕 안에서 말도 안 통하는 칠레 노부부와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다.


겨울에는 비가 많이 와서 여행하기 불편했지만 푸콘은 유유자적 오래 머물고 싶은 도시였다.


첫날을 제외하고 우리는 매일 저녁 요리를 해서 먹었다. 매번 양 조절을 실패해 항상 배불렀다는 게 조금 문제이긴 했지만 어쨌든 항상 풍성하고 맛있었다.


심지어 카이피리냐도 직접 만들어 마셨다. 카이피리냐는 카샤샤라는 술에 라임과 설탕을 적당히 혼합해 만드는 브라질의 칵테일이다. 물론 칠레에 있으니 칠레의 대표적인 술 피스코도 많이 마셨다. 여행하면서 느는 건 잡다한 지식과 술이 아닐까.


종원이형과 비호가 하이드로스피드를 즐기러 간 동안 나는 은정이와 칠레 친구를 따라 폭포를 보러 갔다. 당연히 푸콘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를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고, 길을 잘못 들어 신발을 벗고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과 미끄러운 바위에 앞으로 나가기 힘들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은정이는 표정이 그게 뭐냐며 핀잔을 줬지만 이내 자신도 이런 곳일 줄 몰랐다며 웃음을 지었다.


푸콘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마침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왔다. 칠레 들어온지 거의 한 달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