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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사실 심심한 공간이다. 그나마 출발하는 지점이라면 설레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길 수 있겠지만 갈아타는 지점이라면 한없이 지겨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천공항이라고 꼭 설레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얼마전 한창 설레여야 하는 인천공항에서 무려 12시간 이상 대기를 한 적이 있다. 심각한 일에 머리는 복잡하고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망연자실했다. 대체 12시간을 뭘 하면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인천공항에서 지루하게 대기했던 순간에도 재미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하루에 무려 2명이나 만났는데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 후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혹자는 여행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난다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들어 맞았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1. 사우나에 온 그 남자, 심심했나 보다

몸은 피곤하고, 시간은 무지하게 많이 남았는데 정작 갈데가 없었다. 그 넓은 인천공항에서 갈데가 없는지 처음 알았다.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1시간이지 그 이상은 견디질 못했다. 그때 마침 검색을 통해 인천공항 내에 사우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우나에서 한숨 자면 시간도 보내고, 피로도 풀릴테니 괜찮겠다 싶어서 지하로 내려갔다. 사우나는 시설이 꽤 괜찮았지만 규모가 크다기 보다는 그냥 간단히 씻고, 수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거나 휴게실에서 앉아 쉴 수 있는 정도였다.

무지 피곤해서 오래 잠들 줄 알았는데 2시간 만에 일어났다. 휴게실에 앉아 TV를 보는데 너무 심심했다. 계속 시계만 쳐다보며 남은 시간만 세어볼 정도였다. 그렇게 의자에서 지루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어느 외국인 남자가 내 앞을 왔다갔다 했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았는데 아까부터 이 사람도 무지하게 심심해하는 눈치였다. 내가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결국 그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는 좀 뚝뚝 끊기는 편이었지만 서로 말상대가 생겼다는 마음에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한국에는 처음 왔다는 그는 저녁때까지 친구를 기다려야 해서 아직까지 밖에 나가질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나도 너무 심심했는데 이 친구와 놀면 되겠다 싶어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고, 그도 좋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통성명을 했는데 그의 이름은 예신이었다.

사우나에서 나온 우리는 조금 이른 시각이지만 저녁을 먹었다. 아주 흔쾌하게도 한국 음식을 먹겠다고 했다. 내가 추천해 준 음식은 뚝배기 불고기였는데 그는 의외로 순두부찌개를 골랐다. 순두부찌개가 외국인의 입맛에 잘 맞을지 조금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순두부찌개는 물론 밑반찬도 열심히 집어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예신은 과거에 영국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랍 에미리트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사는 곳도 수도 아부다비였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랍 에미리트 돈을 나에게 선물로 건네주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예신은 교수였다. 그것도 한국의 카이스트에 일이 있어서 온 것이었는데 자신의 학생을 기다리다가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카이스트가 바로 집앞이라 괜히 내가 다녔던 대학도 아닌데 반가워했다. 아무튼 교수라 굉장히 딱딱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아마 그도 혼자 있어서 무지하게 심심하긴 심심했나 보다.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커피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저녁이 되어 헤어질 때까지 같이 있었는데 그때 마중 나오신 한국인과 예신의 학생으로 보이는 아랍 친구들도 만나 인사를 했다. 난 그들과 헤어진 후 곧바로 내가 탈 항공사 카운터로 체크인을 하러 갔다.


2. 배낭여행자는 배낭여행자를 알아 본다

이제 막 카운터를 열었는데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여기가 맞나 싶어 앞을 한번 쳐다보고 줄을 섰는데 내 앞에 있던 남자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이쪽 줄이 맞다고 했는데 그의 등에도 커다란 배낭이 있었다. 아마 배낭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 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낭을 메고 있는 모습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아니면 긴 줄 때문에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시 대화상대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대화가 이어졌다. 독일인 친구였는데 인도네시아, 한국 등을 여행하고 이제 며칠 뒤면 독일로 돌아간다고 했다. 갑자기 인도네시아를 여행했다는 소리에 눈이 반짝이며 나는 지금 가는 길이라고 하니까 몇 마디 해줬다. 그는 불행하게도 발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듣는 내 입장에서는 좀 웃기긴 했지만 말이다.

"나랑 같이 앉을래?" 좀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내가 제안을 했다. 어차피 야간에 뜨는 비행기라 옆에 있는 사람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조금 덜 심심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그도 좋다고 했다. 역시 이 친구 이름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고, 나중에 맥스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잠시 좌석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게이트 앞으로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게이트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 페이스북을 친구 추가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독일 사람이라 축구를 무지하게 좋아하는지 수원에 있을 때 경기장도 찾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키더니 "이거 수원 블루윙스 유니폼이야!" 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뜨기까지 시간은 무지하게 많이 남았지만 맥스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다. 정말 심심할 뻔한 날이었는데 어떻게 하루에 두 명이나 만나 시종일간 수다를 떨 수 있다니 신기했다. 그것도 한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한 사람을 만날 줄이야!


쿠알라룸푸르까지 약 7시간 걸렸나? 나중에는 잠이 들긴 했지만 초반에는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 좋았다. 게다가 이 친구가 내 밥값도 거의 반을 대신 내줬다.

에어아시아와 같은 저가항공사는 예약을 할 때 선택을 하지 않으면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기내에서 사먹을 수 있는 식사가 마련되어 있는데 나중에 너무 배고플 것 같아서 구입하기로 했다. 근데 문제는 잔돈을 말레이시아 화폐인 링깃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한국 돈으로도 구입이 가능하다고 하길래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주섬주섬 꺼냈는데 겨우 몇 천원 밖에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맥스가 가지고 있던 한국 돈을 꺼내 나에게 줘서 겨우 사먹을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내가 10달러짜리를 주려고 하자 괜찮다면서 받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기내식을 먹었는데 슬프게 맛은 정말 없었다. 좀 아깝긴 아까웠다.

우리는 말레이시아 시간으로 새벽에 쿠알라룸푸르에 도착을 했고, 곧바로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갈아타는 곳으로 이동해야 했고, 맥스는 출국을 한 후 몇 시간 후 싱가폴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짧다면 아주 짧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재미있었던 인연은 나중에 페이스북에서 채팅을 통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스는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예신은 아부다비에 놀러오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짧은 만남이라 기억에 남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지만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오히려 그 짧은 시간이 더 즐겁고, 재미있는 추억으로 되새김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