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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정신 없는 아침이었다. 새벽에 다 일찍 깨웠는데 우리만 깨우지 않아 늦게 일어났고, 겨우 준비해서 이젠 화산으로 가나 했는데 이번에는 차를 타면 다시 숙소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에 짐을 챙겨야 했다.  이런건 좀 진작 알려줬어야지 순식간에 민폐 여행자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출발하긴 했는데 별로 친하지 않았던 서양 여행자들은 은근슬쩍 늦었다고 눈치를 줬다.

숙소에서 이젠 화산의 입구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너무 깊숙한 오지인 탓에 평탄하지 않은 길을 아주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략 10명 정도 되는 무리를 데려다 준 곳은 어느 공터였다. 여기가 바로 이젠 화산의 입구인듯 한데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전날 브로모 화산을 오르고, 또 다시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끝에 도착한 이젠 화산. 이제 이 화산을 오르면 된다. 물론 이렇게 말로는 간단했지만 다시 산을 오른다는 사실부터 걱정이 되었다.


정말 여기가 이젠 화산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 조용했다. 심지어 아침 공기를 마시며 오르는 산행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이젠 화산은 관광객이 별로 없는지 브로모 화산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달랐다. 함께 오르는 수많은 여행자도 없었고, 힘든 여행자를 꼬시기 위한 말도 보이지 않았다.

초반이라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이젠 화산은 브로모 화산에 비하면 무척 쉬워 보였다. 일단 경사도 완만했다. 그리고 험하지 않은 길은 걷기에도 무척 좋았다.


그렇게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메고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들은 유황을 캐서 들고 오고 있었는데 우리를 보자 유황에 관심이 있냐고 묻곤 했다. 대체 이 유황을 캐는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유황을 캐서 어디에다 쓰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젠 화산을 오르면 오를 수록 정상이 상당히 멀다는 것과 유황을 캐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유황을 들고, 이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것 자체로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노동인데 이들은 과연 하루에 얼만큼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이젠 화산을 오르는 초입부터 여러 생각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젠 화산을 너무 만만히 보긴 했나보다. 초반에 완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여기도 언덕이 아닌 산이었다. 이젠 화산의 정상까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몰랐는데 짐작컨데 금방 도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다. 화산 여행을 하면서 멋진 풍경을 보는 순간은 좋았으나 그야말로 강행군이었던 것이다. 2박 3일간 하루 종일 이동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화산을 올랐으니 힘들 법도 하다.

게다가 난 다리를 삔 상태였다. 자카르타에 있을 땐 거의 질질 끌면서 이동했고, 족자카르타에서는 파스도 붙이고, 휴식도 취했기 때문인지 많이 좋아졌었다. 하지만 화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발목의 통증이 느껴졌다.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할 때에 여행을 하고 있었고, 그것도 화산을 오르고 있었으니 다시 통증이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래도 오르막 길은 그나마 괜찮았다.


한참을 올라간 끝에 휴게소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물을 마셨다. 근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유황을 파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냥 유황을 파는 것이 아니라 조각까지 해서 기념품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독특하기는 했지만 우리와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기념품으로 살만큼 매력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정도 올라왔으면 브로모 화산처럼 분화구라든지 뭐든 보일 법한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 경사는 점점 심해졌다.


정상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를 수록 유황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근데 다른 여행지에서 맡았던 유황 가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본의 온천 지역에서 보는 수증기나 유황 냄새는 정말 독특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여기는 숨 쉬기가 거북할 정도로 심한 가스가 나왔다.

우리 일행은 다 흩어져서 걷고 있었는데 정상에 다다를 즈음에는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게소에서부터 막대기를 집고 우리를 안내하는 것처럼 따라오던 아저씨도 있었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대화보다는 몸짓과 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나 싶었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정상 근처에서 우리는 아주 어색한 단체 사진을 찍게 되었다. 친해서 찍었다기 보다는 어쩌다 보니 비슷한 곳에 있길래 함께 찍자고 한 것인데 그 아저씨는 우리가 미처 포즈를 잡기도 전에 셔터를 눌러버렸다. 이 때는 키라 말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거의 몰랐고, 심지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젠 화산의 분화구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여행자와 반대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드디어 이젠 화산의 정상에 올랐다. 이젠 화산은 황홀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준 브로모 화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유황 가스로 인해 달걀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처럼 주변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입과 코가 불편함이 느껴졌다. 이젠 화산은 여행자를 반기지 않나 보다.


이젠 화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아름다운 색깔의 칼데라 호수도 아니었고,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내뿜고 있었던 유황 가스도 아니었다. 역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유황을 캐고,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높고, 험한 산인지 알기에 이들의 노역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유황은 정상에서 캐고, 나르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칼데라 호수 근처까지 또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정말 힘들다. 난 그저 카메라 가방만 들고 갔을 뿐인데도 그 길이 너무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유황 가스까지 매일 마시고 있지 않는가.


저 멀리 여행자들이 몰려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아마 저기까지 가면 이젠 화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코끝을 자극하는 유황 가스를 계속 들이키며 걸었다. 반대편에서는 유황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온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젠 화산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 아래 칼데라 호수가 보이고, 사람들을 그곳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보기에도 결코 가깝지 않았다. 키라는 갈 생각이 없는지 그냥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옷을 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옥색 빛이 가득한 칼데라 호수를 보며 감탄했지만 어쩐지 마냥 즐거움만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험난한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역시 이젠 화산은 여행자를 반기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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