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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질수록 카오산로드는 전혀 새로운 장소로 변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하염없이 카오산로드에서 또 방황하다가 이제는 더이상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를 돌아오니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커다란 냄비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외국인이 말이다. 폴게스트하우스에 놀러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아주 자유스럽게 한국어를 했던 외국인이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한 방에 여러명이 묵는 도미토리다 보니 여자와 함께 지내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국말을 하던 외국인은 정말 처음이었다. 근데 그 외국인이 한국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실 '폴 게스트하우스'의 독특한 분위기 탓에 사람들과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외국인과 서로 한국말로 얘기를 하고, 그리고 그 외국인이 닭볶음탕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에 무척 놀라긴 했다.


옆에 계시던 아저씨 그리고 다른 형이 같이 먹자고 불러서 저녁은 닭볶음탕을 먹게 되었다. 물병에 담긴 소주도 한 모금 마시면서 닭볶음탕을 먹는데 내가 장기여행자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저녁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장기여행자인지 장기체류자인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밥을 먹고 난 후에 나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께 내일 치앙마이로 떠나게 되었다면서 혹시 방 값 하루치를 돌려줄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아주 당연하다고 쉽게 120밧을 돌려 받을 수 있었다. 아마 다른 게스트하우스였다면 불가능했을거다. 특히 호주에서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바닥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몇 마디 하다가 나처럼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온 후에 현재는 여행을 하고 있고, 또 얼마 뒤에는 호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여차저차 하다보니 같이 술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근데 시간은 이미 상당히 늦어버려 환전소가 다 닫았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잠깐 돈을 빌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환전소를 찾아 나섰다.


역시 예상대로 내가 자주 가던 환전소는 닫혀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을 가지고 카오산로드쪽으로 갔다.


원래 카오산로드는 이 시간이 가장 사람이 많아지고 시끄럽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더 시끄럽고 더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방학시즌, 휴가시즌이라 한국 사람도 정말 많이 보였다.

환전소가 주 목적이라 이리 저리 찾아다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 시간에 환전소가 열려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환율은 조금 불리했지만 그래도 내 지갑속에 있던 65호주달러를 환전했다. 다른 외국인들도 이 불리한 환전소에서 환전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환전을 하고 복잡한 카오산로드를 벗어나 람부트리로 돌아왔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이 친구에게 이틀동안 만났던 호주인 달러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노점에서 달러스가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달러스에게 다가가 여기서 뭐하냐고 물으니 책을 슬쩍 가리키며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며 웃었다. 내가 달러스한테 우리랑 같이 맥주나 마시자고 제안하니 좋다고 따라왔다.


우리는 노점에서 팟타이를 사서 맥주 안주로 삼아 먹기 시작했다.


나는 태국의 거리에 늘어진 술집을 무척 좋아했다. 혼자서 술을 마셔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혼자 일기를 쓰거나 혹은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술을 마실 때는 항상 혼자였는데 그 때마다 내 옆자리 혹은 앞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친구가 되어줬다. 당연하지만 가격이 싸다는 점도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긴 했다.

어느덧 달러스는 우리 앞테이블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 우리는 같이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조금은 당당하고 유쾌해 보이는 젊은 남자, 중년의 아저씨,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누나일거 같은 여자였다. 이들은 캐나다 사람들이었다.


달러스와 남자는 많이 통했는지 이야기를 쉴새 없이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로 했다. 이들은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면서 위치도 알려주기도 했고, 중년의 아저씨는 캐나다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서로 침 튀기면서 열변을 토하던 달러스와 옆의 남자의 이야기를 지켜보면서 내가 마리사에게 왜 저렇게 저 둘은 흥분을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냐며 나는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니까 마리사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냥 웃었다.

그렇게 우리끼리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네덜란드였는지 아무튼 다른 국가의 남자 2명이 우리 자리에 와서 놀게 되었다. 원래 카오산로드에서는 아무하고나 친구가 되기도 하고,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그냥 술을 마시기도 하는 법이긴 한데 이들의 이상한 차림이나 머리모양은 그렇다쳐도 굉장히 매너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을 하면 심하게 취해서 정신이 없다고 보는게 맞았다.

30분정도 이들과 자리를 함께 했는데 술에 취해서 그런지 우리와 함께 술을 마셨던 캐나다인을 툭치게 되었다. 싸움으로 번진 것은 아니었지만 캐나다인은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고, 이들도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이들이 가자마자 달러스와 캐나다인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저런 개념 없고 싸가지 없는 애들은 처음 봤다면서 흥분을 했다. 나 역시도 그 사람들이 좋았던 것은 아니니 이들의 격한 반응에 수긍을 하긴 했다.

중년의 아저씨는 조금 피곤했는지 먼저 들어간다고 했는데 실제 내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지만 이 아저씨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인지 옆에 있던 마리사에게 내 이멜 주소를 꼭 적어오라고 했다.

우리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헤어졌고, 달러스는 자신의 게스트하우스를 지나 같이 가다가 아예 우리를 바래다 주는 것처럼 멀리까지 쫓아왔다. 태국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이렇게 우연히 3일동안 만난 적은 또 처음이긴 했다. 아무튼 술에 잔뜩 취하긴 했지만 참 재미있는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