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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모두가 생각하는 '세상의 끝'이 아니지만,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 우수아이아(Ushuaia)에는 눈으로 덮여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한국과 정반대의 계절이 더욱 실감났다.


물론 날씨가 추웠다는 이유도 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부터 우수아이아까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했던 여정을 막 끝냈던 터라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었다. 몸은 굳었고, 피곤했다. 거기에 우수아이아의 살인적인 물가는 딱히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아르헨티나 최남단에 있는 도시라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곳인데 생각보다 도시가 큰 데다 비수기에도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우수아이아에서 펭귄을 보거나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등 다양한 투어가 있지만 너무 비싼 데다가 딱히 끌리지도 않았다. 펭귄은 남아공을 여행할 때도 봤으니 굳이 다시 볼 필요도 없었다. 비싼 투어를 하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호스텔에서 만난 미국인 매트와 중국인 마오(원래 이름은 유팅이었지만 이상하게 우리는 성으로 불렀다)랑 가볍게 산행을 즐기러 떠났다. 눈으로 뒤덮여 있는 설산을 오르니 새하얀 풍경이 끝없이 이어졌다.


새로운 여행자와 만나 함께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며 산을 올랐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청량감이 가득했다.


다만 우리의 여정은 금방 끝났다. 길이 꽁꽁 얼어붙어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쉽긴 하지만 우리는 왔던 길을 돌아 우수아이아까지 걸어갔다. 바위 아래 커다란 고드름이 매달려 있어 하나 떼어봤다. 고드름을 직접 만져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잠깐 걸었을 뿐인데 눈앞에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오른 거대한 산과 그 아래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날 때는 무작정 히치하이킹을 하며 남쪽으로 가고자만 했지 우수아이아에 도착한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가 없다는 사실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수아이아에서 우연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던 비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원래 비호는 내가 도착한 다음날 칠레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금방 헤어질 수는 없지 않냐는 나의 꼬임에 넘어가 그 다음날 새벽에 떠나는 버스표를 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비호를 비롯해 여러 사람으로부터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같이 가야 한다며 졸지에 트레킹을 같이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다.


비호를 비롯해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여행자 종원이형, 부에노스아이레스부터 히치하이킹으로 같이 여행했던 동우, 그리고 중국인 마오까지, 이렇게 4명과 함께 칠레로 향했다. 우리는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칠레 남부의 거점 도시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갔다.


나만 잘 몰랐던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는 남미 여행자들 사이에서 트레킹으로 무척 유명한 곳이다. 대게 파타고니아의 이색적인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남미의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찾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토레스 델 파이네다. 그러나 비수기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아 한산하기만 하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하는 W트레킹이라 하더라도 최소 3박 4일이라 장비와 식량은 필수로 챙겨가야 한다. 아웃도어 매장은 물론, 렌탈샵이 많아 대신 필요한 장비만 골라서 빌리는 것도 가능하다. 난 텐트와 매트리스가 있어 등산화와 두꺼운 침낭만 빌렸다. 


나중 일이기는 하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을 마치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과 북으로 길게 늘어진 칠레에서는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칠레 남부는 복잡하고 좁은 해안선, 그리고 높은 산과 빙하로 인해 도로가 없어 아르헨티나의 루타 40(Ruta 40) 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겨울에는 폭설로 인해 루타 40도로로 이동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푸에르토나탈레스에서 수도 산티아고까지 직선거리로만 2,000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라 대부분의 여행자는 육로로 이동할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또 다시 육로를 택했다. 푸에르토나탈레스에서 페리를 타고 도로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원래 나비막(Navimag) 페리를 타고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까지 갈 수 있지만 겨울에는 이 페리는 운행하지 않아 오스트랄브룸(Austral Broom) 페리를 타고 토르텔(Tortel)까지 가는 여정을 예매했다.


7월은 한겨울이라 바다로부터 얼어붙은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홍학이 보였다.


하루 만에 트레킹 준비를 마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4박 5일간 먹을 식량만으로도 방을 가득 채웠다. 거창하게 한 끼를 해결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름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으로 파스타에 쌀, 그리고 빵을 준비했다. 비록 한국 라면이 없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칠레 라면도 괜찮은 편이라 안심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밴을 타고(비수기에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 토레스 델 파이네로 향했다. 졸다 깨다 반복하며 토레스 델 파이네로 향했는데 날이 밝아 오면서 내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하얀 눈이었다. 잠시 후 폭설로 인해 우리 차는 헛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 오르지 못하는 차를 밀어야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트레킹 첫날부터 눈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결국 몇 명은 가방을 메고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눈은 금방 그쳤다.


오랜만에 깨끗하고 새하얀 눈을 보는 것 같다.


우리를 태워야 할 밴이 언제 언덕을 올랐는지 벌써 저 멀리 사라졌다. 곧 되돌아 오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걸었다. 아직 트레킹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야 했다. 


투덜거리며 걸었지만 이내 비현실적인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늘까지도 하얗게 변한 세상에서 구름이 살짝 걷히자 뾰족한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이 지나 우리를 태우러 밴이 돌아왔다. 토레스 델 파이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했다. 비수기라고 반값이었다. 그만큼 비수기에는 찾는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출발 전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젖은 양말을 녹였다. 원래 본격적인 트레킹 출발지라 할 수 있는 파이네 그란데(Lodge Paine Grande)까지 운행하는 페리가 있으나 비수기에는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걸어야 했다.


날씨가 조금 춥긴 했어도 출발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오는 한국인인 우리 4명과 같이 여행하면서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잘 걸었다. 오히려 나보다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거대한 자연 앞에 서면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얀 눈밭을 걸었다. 역시 첫날이라 그런지 트레킹을 하며 사진 찍는 여유가 있었다.


초반에는 평지만 걸어서 부담이 덜했는데 계속되는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니 조금씩 힘에 겨웠다. 땀도 많이 났다.


이내 배낭의 무게가 내 어깨를 조여왔다. 아무리 트레킹을 하는 도중이라 하더라도 밤에 기분이나 내자고 팩으로 된 와인 5개를 들고 왔는데 오늘 꼭 다 마셔서 짐을 줄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잠깐 배낭을 내려놓고 쉴 때면 시원한 것도 잠시, 땀이 식으면서 급격하게 몸이 냉각된다. 쉬고 싶어도 좀처럼 편하게 쉴 수도 없는 게 한겨울 트레킹이다.


한참 먼저 출발했던 서양인 여행자들을 따라잡았다. 아무래도 겨울에 여행하는 사람이 많이 없어 이 친구들과는 4박 5일간 계속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다.


땀으로 젖은 배낭을 내려놓고 호수를 바라봤다.


걸을 때면 힘이 들어 미처 주변 경치를 바라볼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첫날 베이스캠프인 파이네 그란데까지 마지막 힘을 다해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호수에 걸쳐있는 구름이 예쁜가 보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그전까지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산이 바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말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거대함에 압도됐다.


파이네 그란데에 도착하자 금세 어둠이 깔렸고, 추위가 찾아왔다. 한겨울에 트레킹을 하는 여행자가 별로 없는 만큼 산장을 운영하는 곳도 없다. 유일하게 이곳만 겨울에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겨울에는 관리가 잘 되고 있지 않다. 주변이 온통 새하얀 눈 밭이라 애초에 텐트를 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는 없었다. 그냥 눈 위에 텐트를 쳤다. 저녁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고 요리를 할 때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비볐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두꺼운 침낭을 가지고 있다 해도 버티지 못했다.


악몽같은 추위를 견디자 아침이 왔다. 하지만 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아 어둠 속을 헤매야 했다. 휴대폰 불빛에 겨우 의지해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딱 하루 걸었을 뿐인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빌린 등산화가 맞지 않는지 발을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4일이나 걸을 수 있을지, 그저 빨리 내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W자 형태로 걷는 더블유트레킹을 하게 된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여행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코스이기 때문이다. 그 중 W의 좌측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그레이 빙하가 있다. 당연히 오늘 목표는 빙하까지다.


한참을 걸어 호수에 도착했을 때 유빙이 떠내려 오고 있다.


우리가 정말 빠르긴 빠른가 보다. 우리보다 약 1시간 정도 먼저 출발했던 외국인 여행자를 따라잡는 것도 모자라 큰 차이로 제쳤다. 그리고 마침내 빙하를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 왔다. 숨을 헐떡이며 빙하를 바라보는데 저게 정말 빙하가 맞나 싶었다. 빙하는 이제 봤으니 여기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전망대부터 급격한 경사로가 시작인데 이마저도 얼어서 걷기가 쉽지 않았고, 해가 지기 전에 캠핑장으로 되돌아가는 시간도 계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이제 이틀이 되었을 뿐이고 다들 끝까지 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해 계속 빙하를 향해 나아갔다. 


다만 내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확실히 첫날과는 달리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 오죽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을까. 여태껏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더 이상 길이라고 볼 수 없는 길이 이어져 손을 짚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커다란 빙하와 마주했다.


결국 우리는 빙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바위 언덕에 도착했다. 빠르게 이동한 탓에 정신은 반쯤 나가있는 상태였는데 배가 너무 고파 다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주저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땀이 식으면서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르헨티나 엘칼라파테에 있는 빙하가 여행자들 사이에서 더 유명하긴 하지만 역시 빙하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트레킹을 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만큼 가혹한 것도 없으리라. 다시 언덕을 넘고, 바위를 지나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히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우리는 2시간 뒤,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3일차에는 이탈리아노 캠핑장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겨울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산장을 예약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아 적당히 텐트를 칠 수 있는 캠핑장을 기준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제는 사진을 찍을 여유 따윈 없고, 걷는 데만 집중할 뿐이다.


원래 W트레킹을 완성하려면 가운데에 해당하는 바예 델 프란세스(Valle Del Frances)를 가야 하는데 도저히 내 상태로는 오를 자신이 없었다. 빙하를 보러 갔던 둘째 날이 너무 힘들기도 했고, 괜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까 가운데 코스는 건너 뛰기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양인들도 이 구간은 얼어 있는 곳이 많다고 피할 정도였다. 종원이형, 비호, 동우는 이 코스마저 정복하고 싶어해 이탈리아노까지 함께 걷고, 나와 마오만 따로 떨어져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걷게 되었으니 이제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으면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편한 길이 이어질 줄 알았다. 예상과는 반대로 급격한 경사로를 만나 상당히 힘들었다. 지도상으로는 아주 짧은 거리였음에도 급격한 경사로가 이어져 꽤 오랜 시간 걸리게 된 것이다. 내리막길이 끝나면 다시 오르막길이 찾아오는 법이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면서 근처에 흐르는 물을 떠서 마셨다.  


원래 W트레킹의 마지막 코스 근처까지 가려고 했으나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계획을 수정했다. 다음 캠핑장까지는 적어도 5시간 정도 걸어야 할 것 같아 로스 쿠에르노스(Refugio Los Cuernos)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곳 역시 겨울에는 운영하지 않는 곳이었다. 마침 여기서 작업을 하는 아저씨들이 몇 명 있어 텐트를 쳐도 되는지 물어보자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따뜻한 차를 내주면서 밖이 아니라 안에서 자도 좋다는 말을 해줬다.


난로 옆에서 젖은 옷과 양말을 말리고 있으니 다른 서양인 여행자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이들도 오늘 더 걷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정한 것이다. 저녁 때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게 되어 안에서 따뜻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해 들어오라 했는데 작업반장으로 보이던 아저씨는 허락된 인원이 아니라 안에서는 잘 수 없다고 쫓아냈다. 중간에 있던 나는 난감한 상황이었고, 괜히 미안했다. 사실 남는 방도 많았고, 우리에게는 참 착한 아저씨였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물론 밖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것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실내라고 해서 따뜻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거의 냉동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입김이 절로 나왔다.


다시 배낭을 메고 걸었다. 전날 많이 걷지 않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지도만 봤을 때는 중간에 캠핑장이 없어 완만한 평지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우리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첫날과 비교해 날씨가 정말 따뜻해지긴 했는지 얼음이 녹았다. 덕분에 개울을 건너기가 꽤 어려웠다. 


분명 모든 사람들이 감탄을 자아내는 경치인 것은 분명하나, 아무 생각 없이 토레스 델 파이네에 와서 계속 걷기만 하니 여기가 세상에서 손꼽히는 절경이 맞나 싶다.


얼어붙은 땅이 녹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하얀 눈은 사라졌고, 푸르고 생기가 도는 땅을 걷게 되었다. 


날씨가 이렇게 바뀔 수 있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 첫날부터 계속 추위와 싸웠는데 여기서부터는 더위에 겉옷을 벗어야만 했다.


그리스 커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그리스인 여자는 너무 힘든지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할 때마다 멀리서 오르막길이 보였다. 좁은 협곡 사이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칠레노 캠핑장(Refugio Chileno)에 도착했다.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실 이곳에 텐트를 치고 나머지 일행과 기다릴까 생각했었다. 상당히 많이 걸어 피곤하기도 했고, 텐트를 칠 수 있는 장소가 평상처럼 마련되어있어 무척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곳은 이곳이 아니였고, 여기를 베이스캠프로 삼으면 다음날 삼봉으로 걸어가는 길이 상당히 멀다고 판단해 더 걸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아 마지막 힘을 다해 걷고 또 걸었다. 약간의 오르막길에도 숨이 차고, 다리가 풀렸다. 이곳 역시 얼어붙은 길이 많았다. 2시간 동안 힘겹게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난 밤에 잠깐 대화를 나눴던 미국인 친구들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니 이들도 오늘 꽤나 고생했나 보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걷다 이제 막 도착해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와 마오가 텐트를 다 쳤을 때 나머지 일행이 도착했다. 우리가 아무리 천천히 걸었다 하지만 쉽게 우리를 따라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한겨울에 하는 트레킹은 고되다. 모든 게 힘겹다. 6시가 되자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고, 또 다시 추위가 찾아왔다. 딱히 머물만한 곳도 없었으니 허기진 배를 얼른 채우고 자야 한다. 남들은 트레킹할 때 삼시세끼 라면으로 때운다고 하던데 우리는 힘들 때는 잘 먹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챙겨왔다 가지고 왔다. 이날 저녁 메뉴는 파스타였다. 단지 토마토소스인 줄 알았던 케챱으로 만든 파스타라는 게 옥의 티랄까.


5일째 되는 마지막 날은 토레스 델 파이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개의 화강암 봉우리, 삼봉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걸었다. 너무 어두워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개울이 얼어 걷는데 상당히 힘들었다. 거기에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 일출을 보려고 일찍 올라갔는데 흐릿했다.


날씨가 너무 추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해가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지만 삼봉은 점점 더 구름에 가려졌다. 날은 밝아졌지만 끝내 해는 볼 수 없었다.


거대한 삼봉과 푸른 호수가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날씨가 조금 아쉽지만 이 순간을 즐기며 사진으로 남겼다.


뒤늦게 올라온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누구는 꿈꾸던 이곳에 왔다는 벅찬 감동이, 누구에게는 힘겨운 트레킹이 이제 끝났다는 성취감이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4박 5일간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은 너무 힘들었다. 여태껏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추억으로 남겠지만.


토레스 델 파이네 이후 다시는 트레킹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남미 여행을 하면서 어디 그게 뜻대로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