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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므완자(Mwanza)는 여행자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애초에 모시(Moshi)까지 한 번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들린 곳이라 크게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정말 볼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조금 신기했던 것이라면 곳곳에 힌두교 사원이 있다는 것 정도랄까.


정신 없는 시장을 지나 므완자의 중심지로 보이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달리 볼거리가 없어 빅토리아 호수를 향해 걸었다. 빅토리아 호수는 아프리카 최대 호수로 그 면적이 한반도의 40%, 남한의 70%에 해당한다고 한다. 워낙 거대한 호수라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3국의 국경이 맞대고 있다. 케냐에 있을 때도, 우간다에 있을 때도 보지 못했던 이 호수를 탄자니아에 와서야 보게 되었다.


호수 앞에는 독특한 모양의 바위가 있다. 므완자의 유일한 구경거리가 아닐까 싶어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여기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 아무래도 외국인인 나보다 카메라에 관심이 있었나 보다. 내 카메라를 보더니 아주 좋은 거라며 칭찬을 했다.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사진을 같이 찍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다미씨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가 모시로 같았기 때문에 버스를 예약하러 갔다. 탄자니아에는 버스 회사가 너무 많아 고르기가 정말 어렵다. 몇 군데 돌아다니던 도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이사밀로 버스(Isamilo Bus)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탄자니아에서는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적이 많다. 심지어 영어를 할 줄 알았던 사람과도 말이다. 여기서 버스의 출발 시간을 물어보는 과정에서 므완자에서 12시에 출발해 모시에는 8시에 도착한다고 답변을 들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면 모시까지 8시간 만에 가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수 차례 확인을 한 끝에 탄자니아 시간으로 이야기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에티오피아처럼 여기서도 따로 현지에서 사용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므완자에서는 새벽 4시에 출발하고, 여기서 15km 떨어진 버스터미널에서는 새벽 6시에 출발(6시간을 더하면 현지 시각인 12시), 모시에는 저녁 8시에 도착한다는 의미였다. 아니 그럴 거면  탄자니아 시간만으로 얘기하지 왜 국제 시간을 섞어서 이야기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힘들게 표를 구입했다. 다미씨는 므완자에 오늘 도착했는데 내일 떠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나와는 달리 내일 모레 출발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탄자니아의 대도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둠으로 가득했다. 가로등은 왜 사용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버스라 거의 잠을 못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시로 이동하는 동안 정신을 잃었다.


모시에 도착했을 때는 16시간이 지난 오후 8시였다. 킬리만자로로 유명한 이곳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근처에 있던 아루샤(Arusha)보다는 작은 도시이기도 했지만. 배가 너무 고파 얼른 숙소로 가서 체크인을 한 후 근처에 있던 현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므완자까지만 해도 덥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모시로 이동하니 날씨가 굉장히 더웠다. 그리고 무슬림이 많이 보였다. 아마 이 근처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는 것 같다.


모시에 오면 뒷동산을 보는 것처럼 킬리만자로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킬리만자로의 흔적도 볼 수 없었는데 구름이 거의 없던 날 아침, 멀리서 희미하게 킬리만자로 산이 드러났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를 그냥 그렇게 바라봤다. 사실 모시에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목적이 있다. 킬리만자로를 가거나, 세렝게티 사파리를 가거나. 그러나 난 둘 다 하지 않았다. 별로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도 하나의 이유였다.


확실히 모시에는 관광객이 자주 보였다. 그렇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괜찮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킬리만자로도, 세렝게티도 가지 않는 나에게는 그저 작은 동네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내가 도착한 다음날 다미씨 합류) 별다른 일정도 없이 밥 먹고, 동네 한 바퀴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


모시에서 지내는 동안 사람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길을 건널 때 차가 먼저 멈추는 것을 보고 안심했건만 도둑을 만났다. 그것도 새벽 3시에.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 도미토리의 창문은 외부로 향하고 있는데 세상에 도둑은 그 창문을 통해 다미씨 가방을 훔쳐가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이어폰을 꼽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어서 비명 소리를 못 들었는데, 창문 너머로 뻗은 손에 자신이 가방이 보인다면 얼마나 놀랬을까. 아무튼 창문을 사이로 두고 가방을 붙잡은 채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하고, 도둑은 오로지 작은 가방 하나만 가지고 갔다. 나보다 여행을 더 많이 다녀 별의별 일을 다 겪어서인지 아니면 그럴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미씨는 도둑과의 사투(?)를 이어갔다. 그런데 무서움보다도 황당함이 앞섰다고 했다. 창문이 있는 바깥에는 약간의 도랑도 있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래에 있는 가방을 잡을 수 없거니와 철창이 있어 도구를 이용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도둑은 주인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방을 놓지 않는 뻔뻔함도 보였다. 정말 다행인 건 훔쳐간 작은 가방에는 중요 물품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숙소 바로 옆에서 도둑이 버리고 간 물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모시에서 3일간 지낸 후 이번에도 나 혼자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으로 이동했다. 역시 버스를 예약할 때 벌떼처럼 달려드는 삐끼를 물리치느라 힘들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탄자니아의 수도인줄로 알았던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였다. 잔지바르(Zanzibar)로 가는 마지막 페리가 4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나는 황급히 달라달라를 타고 시내로 간 뒤 버스를 타고, 다시 보다보다(오토바이 택시)까지 타고 페리 터미널로 갔건만 페리는 이미 떠났다. 사실 마지막 페리는 3시 반에 있어 어차피 제 시간에 왔어도 타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이동하기로 하고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숙소 YMCA로 갔다. 여기에서 프랑스인과 아일랜드인을 만나 같이 맥주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리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불과 며칠 전 다르에스살람에서 납치(주로 가짜 택시에 의한)를 당한 호주인과 독일인의 이야기였다. 사실 동아프리카에서 위험한 도시로 유명한 나이로비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다르에스살람도 여행자 사이에서 위험한 도시로 악명이 높다. 나 역시 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 다른 여행자로부터, 그것도 아주 최근에 당한 여행자의 소식을 들으니 괜히 쫄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걱정이 지나친 것도 그리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조심하지 않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다음날 아침 페리를 타고 잔지바르로 이동했다. 거금 35달러를 줘서 그런지 페리는 굉장히 깨끗하고 빨랐다. 그리고 흔들림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잔지바르, 특히 스톤타운의 분위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무슬림이 90%이상이라 종교적인 차이도 있을 테고, 돌로 만들어진 하얀 집 사이에 형성된 골목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애초에 잔지바르는 다른 나라(탄자니아는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져서 생긴 연방국가)이기도 했고. 인종도 아랍과 인도계가 섞여있으니 탄자니아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거기에 바다가 있는 섬이라 휴양을 즐기거나 카이트 서핑을 즐기기 위해 찾는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곳이라 외국인이 정말 많았다. 아프리카에서도 여행자는 항상 만나지만 지난 4개월이 동안 가장 많은 외국인 여행자를 여기서 본 것 같다.


고급스러운 호텔이 많았다. 확실히 숙박비 부담은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올라갔다. 가장 저렴하다는 숙소도 보통 15달러 정도는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먹는 것만큼은 부담이 없었는데 현지 식당이나 거리에서 끼니를 때우면 전혀 비싸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찾는 식당은 최소 12,000실링(약 6,700원) 이상이었지만 내가 잔지바르에 있는 동안에는 보통 2,500~4,000실링으로 밥을 먹었다.


바다로 가봤다. 멀리서 봤을 때는 초록빛에 가까운 바다색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정도로 깨끗한 바다는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오랜만에 보는 바다라 그런지 기분이 상쾌했다. 생각해 보니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이후 처음 보는 바다였다. 그때는 이런 해변이 아니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처음이나 다름 없다고 봐야 할까.


저녁에는 드디어 형근이와 진화를 만났다. 여행하다 보면 비슷한 경로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는 많으나 이렇게 여러 번 만나는 건 흔치 않다. 형근이와 진화는 이집트에서부터 무려 6번째 만남이었다. 물론 이들은 어떻게 자전거 여행자보다 느릴 수 있냐며 구박을 주긴 했지만. 아무튼 정말 반가웠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여행자 시철씨와 석현씨도 만났다. 우리는 수다와 술을 나누며 자정을 가볍게 넘겼다.


잔지바르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 모두 늘어졌다. 아침을 먹고 쉬고, 점심 먹고 쉬고, 바닷가 앞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쉬고. 그러다가 저녁에는 술 마시며 달렸다.


여행자가 많아도 좁은 골목에서 베어 나오는 그들만의 분위기는 그대로다.


항구 근처에 여행자를 위한 야시장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아 모르겠고, 우리는 항상 잔지바르인들이 가득한 현지 야시장을 애용했다. 원래 이 자리는 낮에도 시장인데 밤이 되면 먹거리를 파는 곳으로 바뀐다.


싸고 맛있는 게 많다. 밥을 먹는다면 1,500실링에도 해결할 수 있고, 돈을 조금 더 들여서 생선이나 탄자니아 피자 등 여러 음식을 사서 먹을 수도 있다.


야시장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역시 냄새와 연기로 시선을 끄는 꼬치다. 어쨌든 먹을 것이 많으니 신났다.


탄자니아 피자(잔지바르에서는 잔지바르 피자라고 부름)를 기다리는 동안 시원한 사탕수수 음료를 마셨다.


잔지바르에서는 하루가 참 단순했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니 기분이 들뜨고 즐거웠다.


잔지바르 물가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 걱정했는데 먹는 것만큼은 저렴했다. 아침은 숙소에서 주니까 걱정이 없었고, 점심은 주로 2,500실링으로 왈리나시(Wali Nasi)를 먹었다. 신기하게도 왈리나시는 약간 김치찌개 맛이 났다.


며칠간 지냈어도 스톤타운의 골목길은 늘 헷갈렸다.


탄자니아로 넘어온 이후 날씨가 덥다고 느꼈지만 잔지바르에서는 더했다. 게다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짠바람은 어찌나 끈적이던지 하루에 샤워를 몇 번을 해도 찝찝함이 느껴졌다.


스톤타운 내에 있는 건물이 너무 오래돼 나무로 지탱하는 것 같은데 이런다고 이게 안전한지 모르겠다.


스톤타운을 한 바퀴 돌고 우리는 바다로 갔다. 바다 옆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게 역시 하루 중요한 일과였다.


더위도 식힐 겸 바다로 뛰어 들었다.


잔지바르에 있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고 자부하는데 정말 그랬나 보다. 기세 좋게 바다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물도 아니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왔으니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경찰서까지 가서 휴대폰을 되찾고, 케냐에서는 도둑한테 뺏길 뻔한 적이 있어도 내 손에서 떠나지 않는다 싶었는데 결국에는 내 부주의로 고장이 나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말이다. 그런데 정말 다행이랄까. 상심하고 있던 나에게 석현씨가 남는 여분의 휴대폰이 있으니 주겠다고 했다. 사실 휴대폰이야 오래된 거라 고장이 나도 상관 없었지만 요즘에는 휴대폰이 없으면 여행하는데 엄청 불편해 그냥 있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사양은 낮아도 최근에 산 휴대폰을 선뜻 준다고 해서 정말 고마웠다.


휴대폰 때문에 잠시 멘붕에 빠졌지만 주변 경치와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며 잊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다 내 잘못인 걸.


저녁이 되자 해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축구를 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바라봤지만 유난히 관심을 보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시철씨였다. 시철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해왔고,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부상으로 축구를 계속 할 수 없어 꿈을 접어야 했다고. 이런 사연을 가진 시철씨가 탄자니아에 있을 때 아주 특별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구하던 도중 호스트가 축구팀을 운영하는 것을 알고 숙식을 제공해주면 축구 코치를 하겠다고 자처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70명이나 되는 축구팀에 공이 4개 밖에 없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시철씨는 페이스북에서 축구공을 구입하기 위한 기금마련에 나섰고 짧은 기간이지만 173명이나 참여할 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덕분에 축구공 30개는 물론이고 조끼와 보호대 등도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당 내용은 최근 기사(탄자니아에 전해진 한국의 ‘작은 관심’)로도 다뤄졌다.


해는 서서히 저물었지만 뜨겁게 달궈진 대지는 식을 줄 몰랐다. 밤에도 더운 건 마찬가지였고, 여전히 끈적였다.


물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정박한 배에 올라가 다이빙을 하곤 했다.


잔지바르에서 만나 3일간 함께 지냈던 시철씨가 가장 먼저 떠났다. 시철씨는 대부분의 여행자와는 달리 모로코에서 잠비아로 날아와 북쪽으로 가고 있어, 아프리카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한 번씩 안아주며 떠나는 자의 행운을 기원했다.


오후에는 스톤타운에서 남쪽으로 약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키짐카지(Kizimkazi)에 갔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남쪽 바다를 보기 위해 갔는데 생각보다 훨씬 작은 마을이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곳은 돌고래를 보기 위한 장소로 유명했다. 딱히 이곳에서 할 것도 없고, 돌고래 보러 가자고 꼬시는 현지인들의 말에 고민을 하다가 결국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나름 돌고래 투어인데 돌고래는커녕 물고기 한 마리도 보기 힘들었다. 대신 어마어마하게 몰아치는 파도에 작은 보트는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았는데도 파도가 움직임에 따라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과 없는 돌고래 투어를 마치고 스톤타운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난데 없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 달라달라가 오후 4시 반이라 이제는 택시를 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택시비는 뻔했기에 우리는 절대 탈 수 없다고, 게다가 너희들을 믿고 투어를 했으니 다른 방법을 알려달라 했다. 결국 그들은 차가 다니는 도로까지 우리를 데려줬고,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차를 탈 수 있을 거라 했다.


히치하이킹을 할 생각으로 차를 기다리는데 사람과 짐을 실은 트럭이 우리 앞에 멈췄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트럭 뒤에 올라탔다. 늦은 시각에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며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싣고 돈을 버는 가 보다. 자리는 좁고 불편했으나 바람을 맞으며 지나치는 작은 마을을 바라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난 아프리카에 있구나, 라는 쓸데 없는 감상이었다고 할까.


스톤타운에서 벨기에 여행자 스텝을 다시 만났다. 약 1달 전에 케냐 나이바샤에서 만나 같이 자전거를 타고 사파리를 돌다가 헤어졌는데 놀랍게도 잔지바르에 있던 것이다. 다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벨기에로 돌아가기 직전이라 아쉽게도 아침에만 잠깐 만나고 헤어졌다.


잔지바르에서 5일째 되던 날, 형근과 진화는 다르에스살람으로 떠났다. 곧장 잠비아로 가서 다시 자전거를 탈 이들과는 달리 나는 말라위로 갈 예정이라 앞으로 다시 만나기는 힘들어 보였지만 “형, 남아공에서 만나요!”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했다. 6번의 만남과 7번의 헤어짐이었다.


잔지바르가 큰 섬은 아니지만 5일 동안 스톤타운에(Stone Town)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모두 떠나고 혼자가 되자 난 잔지바르의 동쪽에 있는 파제(Paje)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내릴 곳을 지나쳐 핑궤(Pingwe)까지 가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핑궤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해야 할까. 핑궤 바다색은 ‘초록색’이라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다. 저 먼 바다에서 오는 짙은 물결은 해변에 도달하면 옅은 색깔로 변해 여러 개의 층을 이루었다.


핑궤에는 꽤 유명한 장소가 있는데 바로 바위 위에 있는 식당이다. 사실 해변과 매우 가까워 걸어가도 무방하지만 손님을 태우는 보트가 있다. 보트를 타면 5초 만에 도착한다는 게 조금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이 식당의 가격이다. 가장 싼 샐러드가 18달러인 것을 보고 메뉴판을 조용히 내려놨다. 물론 경치는 나름 괜찮았지만 이런 비싼 식당에 머무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웠다.


오는 도중에 만났던 한국인 여행자 둘과 같이 사진을 찍고 원래 목적지인 파제로 돌아갔다. 우리는 파제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역시 물가가 비싼 곳답게 적당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도중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허름한 숙소를 깎고, 깎아 7달러에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파제에서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김치말이국수를 먹었다. 이미 한국인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 김치말이국수는 일본인이 개발한 것이라고 한다. 워낙 한국 음식을 좋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그 일본인은 볼 수도 없었다.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으나 가격이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것도 최근까지 15,000실링이었는데 지금은 17,000실링이다.


분명 이곳은 시골마을인데 바닷가로 가면 외국인을 위한 리조트나 바가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실제로 파제는 완전히 외국인을 위한 바다였다. 하늘을 가득 메울 정도로 카이트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고, 해변을 걷거나 일광욕을 하는 사람은 전부 외국인이었다.


카이트 서핑을 하려면 바람이 항상 강하게 불어오는 곳에서만 가능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레저 스포츠가 아닌데 파제에서는 그 조건이 충족되나 보다. 이런 장소는 세계에서도 몇 군데 없다고 한다. 아무튼 직접 할 수는 없으니 남들이 하는 것을 구경만 했는데 자유자재로 서핑을 즐기는 사람은 공중에서 회전을 하며 날아갈 정도로 잘 탄다.


당연히 이런 곳이라면 외국인 물가가 형성돼 있는 법. 다행히 마을에는 현지인들을 위한 식당이 몇 군데 있고, 노점이 있어 저렴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었다.


하루는 파제에서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진 잠비아니(Jambinai)로 가봤다. 일단 가볍게 걷다가 지나가는 차를 히치하이킹했는데 원래 우리 목적지보다 훨씬 더 먼 곳까지 태워줬다. 이곳도 역시 바닷가에만 외국인을 위한 근사한 리조트가 있을 뿐, 특별한 풍경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파제보다 더 한산했고, 바다도 덜 예뻤다. 그래서 잠비아니 주변을 걷다가 밥을 먹고 파제로 돌아왔다.


파제에서 3일간 지낸 후 스톤타운으로 돌아왔다. 원래 잔지바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능귀(Nungwi)도 가보려 했으나 바다는 다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이제는 다르에스살람으로 돌아가 타자라 열차를 타야 할 것 같았다. 말라위 비자도 받아야 했고.


시철씨가 세렝게티에서 만났다는 한국인 여행자와 만나 커피 한잔 하면서 석양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른 2명의 한국인 여행자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약간의 수다를 떨었다. 나를 제외하고 다들 짧은 일정의 여행이라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투어에서 늦게 돌아왔는지 만나진 못했다.


다르에스살람으로 돌아갈 때는 플라잉 홀스(Flying Horse) 페리를 탔다. 이 페리 역시 외국인에게 두 배 이상 비싸게 받는데 그럼에도 킬리만자로보다는 싼 20달러였다. 대신 하루에 딱 한 대 있는 페리는 밤 9시에 출발해 그 다음날 새벽 6시에 도착한다.


다르에스살람으로 돌아오니 다시 다미씨를 만나게 되었고, 또 다른 한국인 여행자 병길씨를 만나게 되었다. 병길씨는 잔지바르를 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시간이 남아 나와 함께 말라위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받기로 했다. 찾아가는 방법이 복잡할 줄 알았던 말라위 대사관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자도 당일 바로 받았다. 다만 나중에 듣기로는 말라위 비자는 국경에서 바로 받는 게 75달러로 더 싸다고 한다. 인터넷이나 여러 사람들의 정보로는 국경에서 비자 받는 게 간혹 힘들 수도 있다고 해서 일부러 대사관까지 찾아갔는데 오히려 비싸게 100달러나 내고 받았으니 속이 쓰렸다.


말라위 대사관 바로 옆에는 놀랍게도 북한 대사관이 있었다. 어쩌면 한국 사람에게는 말라위보다 더 신기하고 관심이 가기 마련인 북한 대사관이 보여 기분이 묘했다. 혹시 이곳에서 기웃거리면 북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상상을 해봤지만 높은 담장과 살짝 휘날리는 어색한 인공기만 보고 돌아서야 했다.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지만 다르에스살람에서는 굳이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나와 다미씨는 곧장 타자라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타자라(TAZARA:Tanzania Zambia Railway Authority) 열차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무척 유명하다. 탄자니아와 잠비아를 연결하는 데다가 국립공원도 지나기 때문에 여러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동물은 본다거나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는 없었다. 아무튼 여행자는 대부분 이 열차를 타고 잠비아로 향한다.


열차를 타기 며칠 전 전화를 했을 때 이미 1등석은 매진이라 2등석 밖에 예약을 할 수 없었다. 조금 좁긴 했지만 2등석도 괜찮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열차는 깨끗했고, 시설도 좋았다. 2등석은 6명이서 한 방을 쓰는데 출발할 때는 탄자니아인과 잠비아인 그리고 전날 숙소에서 만났던 미국인과 함께 했다.


첫날에는 계속 산만 지나쳐 별다른 풍경을 볼 수 없었는데 이틀째가 되자 작은 마을을 자주 보게 되었다.


잠시 멈춘 열차를 향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뛰어왔다.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왔다.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내 입장에서 열차는 너무나 느렸다. 음베야(Mbeya)까지는 점심 때면 도착할 줄 알고 있었는데 2시가 지나고 3시가 지나도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쫄쫄 굶은 배를 부여잡고 버티던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음베야에 도착했다. 무려 29시간 만이었다. 음베야 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귀찮게 따라오는 삐끼들과 한바탕 신경질을 부리다 숙소를 잡았다.


너무 배고파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던 식당으로 달려갔다.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는 고기와 오믈렛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는데 옆에 있던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해서 같이 사진도 찍었다.


음베야는 말라위로 넘어가기 위한 도시 그 이상도 아니었기에 다음날 바로 떠났다. 다만 원래 말라위로 바로 가려다가 다미씨가 투쿠유(Tukuyu)로 간다고 하길래 나도 따라갔다.


음베야에 고작해야 몇 시간 머물러 어떤지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투쿠유가 더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아마 국경과 가깝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 더 머물렀을 것 같다. 투쿠유에서 하루만 지낸 후 곧바로 말라위 국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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