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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나와 나는 곧장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걷고 있는 이 길이 여느 일본의 골목길과 다르지 않았지만 바로 이곳이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점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느낌이 새로웠다. 방금 전에 원폭자료관을 갔다와서 그런지 몰라도 모든 건물이 쑥대밭이 되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사라져간 곳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평화스러운 분위기의 골목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여기가 정말 원자폭탄이 떨어졌었나 싶었을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대충 평화공원이 있을 법한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는데 금방 나타날 것처럼 보였던 평화공원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별로 없었던 나로써는 거리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이미 이상한 길로 들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원폭자료관 방향으로 돌아가니 그제서야 평화공원이라고 큼지막한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다.


평화공원 앞에 도착했는데 이제는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빨리 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언덕을 올라갈 생각하니 갑자기 가기가 싫어졌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해야 이런 언덕 때문에 안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피곤해 죽겠는데 오르막길을 올랐고,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대에 공원을 조성한 곳이 바로 평화공원이다. 여전히 전범국가가 평화를 기원한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전쟁은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맞고,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발생한 사상자들은 대부분 시민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나 역시 여기에서 평화를 기원해야 할 것 같았다.

언덕 위에 있었던 평화공원은 조형물들이 배치되어 있고, 시원하게 솟구치는 분수가 눈에 띈다. 이 분수는 일명 평화의 샘이라고 부르는데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목마름에 괴로워하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평화의 샘에서 일직선 상에 배치된 커다란 조각상은 평화기념상으로 원폭투하 10주년을 기념해서 완성되었다. 이 청동기념상의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 수평으로 펼친 왼팔은 평화를 그리고 눈을 감은 것은 원폭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한다.


평화공원 근처에는 우라카미 형무지소가 있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형무소 내의 모든 사람이 즉사했는데 그중에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참 나가사키 곳곳에서 우리의 슬픈 역사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먼 이국땅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조선인을 위한 그리고 중국인을 위한 추모탑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구석진 곳에 숨어 있다. 남의 나라 그것도 일본땅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사라졌을지 정말 슬픈 일이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추모해야 할 분들이 여기에 잠들어 있다.


마침 수학여행을 왔는지 아니면 소풍인지 모르겠으나 평화공원에는 교복입은 학생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깃발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에서 온 것 같았다. 원폭자료관에서도 학생들을 만났는데 여기에서도 또 다른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도 무슨 생각을 할까?


학생들이 자리에 앉아 단체사진을 찍는데 순간 영화의 한장면처럼 느껴졌다.


평화공원에서 우두커니 서서 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보다보니 벌써 내게 남은 시간이 거의 없었다. 평화공원을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이 나는 또 뛰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에서 내가 원했던 원자폭탄 투하지점과 원폭자료관 그리고 평화공원까지 다 둘러보기는 했지만 가장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과 카스테라는 구경도 못한채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