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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키,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본 곳이라 생각했다. 정말 단순하게도 말이다. 나가사키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는 패배라는 폐색이 짙어지고, 연합군에게는 승리를 장식한 사건, 바로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전쟁사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런 나가사키에 당연히 원자폭탄에 의해 폭격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되었던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 및 박물관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일본에게는 아픔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 아니 그런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나가사키에서 원폭관련 시설들을 둘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에 호텔에서 간단히 빵과 씨리얼로 허기를 해결하고, 곧바로 나가사키 역을 향해 갔다. 오늘은 유후인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조금 서두르기로 했다. 여러모로 큐슈에서는 편안하게 쉬면서 돌아다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침이라 그런지 노면전차는 여행자인 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학교에 가는 교복입은 여고생, 꾸벅꾸벅 졸고 있는 회사원의 모습을 보니 새삼 일상의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배낭을 메고 여행자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내가 이들의 일상에 침범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 어쩌면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나가사키 역에 도착하자마자 이제는 익숙하게 코인락커 앞으로 달려가 400엔을 집어넣고 배낭을 넣었다. 역에 가면 코인락커부터 찾는 것은 적응이 되긴 했는데 코인락커에 사용하는 300~400엔은 항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은근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곤 했다.

배낭을 넣고 난 후 JR사무실로 가서 유후인으로 가는 열차표를 예매했다. 열차표는 2장 받았는데 이는 유후인으로 한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토스에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10시 53분이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시간 정도였으니 굉장히 촉박하게 움직여야 했다. 과연 원자폭탄 투하지점, 원자폭탄 박물관, 평화의 공원을 3시간 만에 둘러보고 돌아올 수 있을까?

글세. 그런 생각을 머리로 하기 전에 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나가사키의 노면전차 노선이 조금 단순했다는 것이다. 120엔을 넣고 노면전차에 오른 뒤 지도를 보면서 마츠야마쵸 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마츠야마쵸 역에서부터 원자폭탄의 낙하지점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낙하지점이 가장 가까워 보여서 가장 먼저 찾아가기로 했고, 그 다음에 원자폭탄 박물관을 갔다가 평화의 샘이 있는 평화공원으로 가면 대충 이동경로가 잘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역에서 무척 가까웠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던 원자폭탄 낙하지점은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겨울이었고,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 이른 시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화마가 휩쓸고 갔던 이곳은 사람들의 휴식처인 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역시 사람들이 웃고 떠들 수 있는 공원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당시 2만 4천명의 인구였던 나가사키에서 사망 73,884명, 부상 74,909명이라는 수치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실감케 해준다. 사실 나가사키는 이보다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 나가사키 시민들은 간간히 폭격이 이루어지는 나가사키를 벗어나 시골로 이주하고 있었고,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도 원래 목표지점 보다 3km떨어진 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폭탄이 떨어진 즉시 몇 만명이 즉사했던 것은 엄청난 위력이긴하다.


나가사키 원자폭탄의 투하된 지점은 바로 이 성당 위라고 한다. 1914년에 완공된 우라카미 성당은 1925년에 두 개의 첨탑을 완성시켰다. 이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라고 하는데 원자폭탄에 의해 돔은 다 날아가버리고 벽의 일부만 남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11시 02분,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다. 히로시마의 원폭에 이어 나가사키에 떨어지자 일본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기껏해야 비행기 2~3대로 도시가 불바다가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는데 나가사키까지 이어지니 새삼 원자폭탄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경우 몇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1945년 2차례 원자폭탄에 그해 8월 14일 그러니까 나가사키 원자폭탄히 투하된지 5일 뒤에 항복의사를 전했다.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8월 15일에는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공원에 있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원자폭탄의 낙하지점 그리고 당시의 현장이 보존되어있는 구역을 볼 수 있다. 돌과 철 등이 고열로 녹아 엉켜붙은 모습도 확인할 수 있고, 이로인해 원자폭탄이 나가사키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일본은 전범국가이다. 전범국가를 넘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국가에서 저지른 만행은 알려진 것만 하더라도 엄청나다. 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쟁박물관인데 항상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원자폭탄의 피해 실상을 보면서 측은지심이 느껴지면서도 그들의 만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되었던 이곳은 이제 거짓말처럼 바뀌어 건물도 빼곡히 들어서게 되었고, 아름다운 공원도 생겨났다.


원자폭탄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도중 한글이 보이는 안내판 앞에 멈춰서게 되었다. 내용은 일제식민지 당시 강제로 끌려와 노동을 당하는 조선사람이 나가사키 주변에 3만명 이상 살고 있었는데 원자폭탄에 의해 약 2만명이 피폭했다고 한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와, 학대혹사하며, 강제로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게한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념원하여 마지 않는다.'


이 작은 추도비는 바로 일본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간 조선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었다. 내가 굳이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전범국가의 피해상황을 알게 되고, 핵전쟁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되지만 그보다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민족의 아픔을 여기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여기에 온 목적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강제 노역을 위해 일본 땅으로 끌려왔다가 원자폭탄을 맞아 즉사하거나 병에 걸려 죽은 조선인들은 바로 우리 근대사의 슬픈 역사였다.


이념의 대립, 전쟁, 학살,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핵전쟁, 2차세계대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결국 무고한 시민들의 피해였다. 일본이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원자폭탄의 피해자는 대부분 일반 시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역시 전쟁은 끔찍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천황(경우에 따라서는 일왕이라고 부르자는 의견도 있다)이 신이라서 자국민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천황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는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이 2차세계대전의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이 독립한 계기가 되었다. 근데 이 공원을 둘러보고, 원자폭탄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정말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전범국가이니 과오를 인정해야 된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피해는 정말 심각했고,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 앞에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또 피로 시작한 전쟁은 피로 막을 내려야 했던 과거사는 정말 엄청나게 복잡한 이념대립도 숨어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맨하튼 계획'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서 어떻게든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성과를 보여줘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식민시대에서 겪은 일본의 만행을 그냥 넘어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난 여행자의 입장에서 나가사키를 둘러보면서 당시의 원자폭탄으로 인해 입은 피해상황을 보고 앞으로 이런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느낌은 가지게 되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에서 팻맨Fat Man(원자폭탄의 이름)이 떨어졌다. 원자폭탄은 당시 대부분 나무로 이루어진 집들을 모두 불태웠고, 사람들은 폭탄의 위력 앞에 즉사했다. 이어 핵폭풍이 불어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은 방사능에 노출돼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항구도시가 죽음의 도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미 역사책의 뒷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이곳에 나는 서있었다. 지금은 기록으로만 찾을 수 있는 원자폭탄에 의한 피해, 그리고 무고한 조선인들이 죽음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